메이 데이
생각보단 싱겁게 끝이 났다. 5월1일 메이데이를 기해 열린 ‘이민자 없는 날의 시위’는 히스패닉들의 막강한 숫적 파워만 보여준 단체 걷기운동이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미국에 20년 이상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데다가, 5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인타운을 관통하는 윌셔 가를 지나며 시위한다고 며칠전부터 신문 방송들이 겁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후 2시부터 8시까지 도로가 통제된다니, 바로 윌셔 길에 위치한 한국일보의 경우 퇴근을 어떻게 하나가 다들 걱정이었고, 시위 종착지점(윌셔와 라브레아) 가까이 살고 있는 나의 경우, 집에 갈 일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방과후 아들 픽업으로서, 아들이 타고 오는 스쿨버스가 도저히 윌셔를 뚫고 올 수 없음을 알게되자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나는 아들에게 학교 끝나면 밸리에 사는 친구 집으로 놀러가도록 했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하면서 아들을 픽업, 둘이 저녁을 사먹고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소동이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된 것은 나로서는 하루 저녁 밥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었고, 아들로서는 방과후 처음으로 다른 노선의 스쿨버스를 타고 친구 집에 놀러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혹시 점심부터 길이 막히거나, 직원들의 퇴근이 늦어질 경우를 대비해 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카레라이스와 짜장밥)을 무료로 제공했다.
시위가 심각해질 경우 타운에 사는 몇몇 동료들은 집에 걸어가겠다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고 실제로 이미 아침에 걸어서 출근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교통지옥이 될 것으로 우려했던 시내 트래픽 사정은 오히려 보통 날보다 훨씬 좋았다. 많은 업체들이 문을 닫았거나 혼잡을 우려해 사람들이 타운에 나오지 않았는지 아침부터 한산했고 점심때도 조용했다.
드디어 오후 4시께부터 윌셔 대로를 따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히스패닉, 아니 그렇게 많은 인간을 본 적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을 때 개미떼라거나 벌떼 같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건 뭐 그런 표현이 가당치도 않을 만큼의 숫자였다. 끝이 안 보이는 인파가 저녁 7시 넘어서까지 세시간 이상 계속 밀려 내려왔다.
흰색 티셔츠들을 입고, 성조기와 멕시코 국기를 들었으며, 물 한병 씩 들고 삼삼오오 짝이 되어 걸었다. 과연 아이를 많이 낳는 그들답게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걷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마켓 샤핑 카트에 아이를 싣고 가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고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아들이 다니는 브라보 매그닛 고교에서도 이날 4분의 1정도가 결석했다고 한다.
시위대는 깃발을 흔들고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불렀지만 우려했던 만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다만 거리에 계속 쌓이는 쓰레기, 그리고 정말 괴로운 문제는 시위대가 건물 주변 곳곳에 실례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윌셔가의 모든 건물이 그랬지만 우리 회사도 점심때부터 출입문을 폐쇄했는데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이 후미진 곳을 보면 찾아 들어가 쉬를 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신문사는 다음날 아침 건물 주변을 물청소 해야했다.
시위가 끝날 때가 되자 도대체 저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집에는 어떻게 갈까, 궁금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저녁 7시가 넘으니까 시위대의 방향이 반대쪽으로 바뀌었다. 그 먼 거리를 다시 걸어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하긴 60만이 모였다는데 무슨 수로 움직일 것인가.
나는 8시 넘어 퇴근했는데 윌셔뿐 아니라 6가 길에도 돌아가는 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컴컴하게 어두워진 주택가를 무리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자니 안 됐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짜증이 솟아올랐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가. 우리 한인들 중에도 불법체류자가 많아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말한다면 나는 ‘불법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불법인 신분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불법을 불법이라고 말하는 미국사회에 대해 너희가 잘못됐다고, 우리 때문에 너희가 살고 있다고, 우리가 일 안하는 하루를 견뎌보라고, 그리고 우리를 합법으로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주객이 전도됐다는 느낌을 갖게되는 것, 그런 사람이 나 하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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