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다 늦게 외식을 하자고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다음날 아이들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 망설이다가 얼큰한 아구찜 제안에 바로 튀어 나갔다. 고깃집이지만 아구찜을 맛있게 해서 고기를 끊고 나서도 자주 가는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토요일이라지만 밤9시가 되었는데도 기다리는 줄이 한참 길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30여분 동안 차츰 주위사람들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태반이었다. 중국말, 일본말, 스페인말... 가만 여기가 한국 음식점 맞나? 겨우 차례가 돼서 자리에 앉고 보니 앞뒤엔 중국사람, 저쪽 너머엔 국적 모를 백인집단이 눈에 띈다. 물론 한인이 가장 많았지만 타인종에게 그리 알려졌을 거라 여겨지지 않던 음식점이 이렇듯 국제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옆 좌석의 중국 아가씨들 팀이 고기 콤보를 된장찌개까지 야무지게 해치우고 나서는 우리 식탁에 놓인 아구찜을 가리키며 냉면이냐고 물어왔다. 아마 머리, 꼬리가 잘린 채 양념에 범벅이 된 콩나물이 국수 가락처럼 보였나 보다. 신이 나서 아구찜과 냉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 후 아구찜은 시식까지 시켜주었더니 두 아가씨가 열심히 ‘아.구.띰’을 외운다. 아무래도 오래 기억하기 힘들 것 같아 그냥 ‘아구’만 외우라고 말해주었다. 다음엔 꼭 시켜먹겠단다. 그러고서도 냉면에 미련이 남아 어느 집 냉면이 맛있는지 물어온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집으로, 찾기도 쉬운 한 음식점을 일러주고 덤으로 마켓에 가면 라면처럼 손쉽게 집에서 해먹을 수 있는 제품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냥 외우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지 종이까지 꺼내서 적어 달란다. 대단한 열성이었다. 두 아가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번엔 “우리 한국 드라마, 배우 너무 좋아해요” 한다. 대장금, 이영애, 지진희로 시작하여 줄줄이 꿰더니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좀 추천해달란다. 마침 내가 일하고 있는 USC 한국학 도서관이 중점을 두고 있는 전문분야 중 하나가 한국영화이고 내가 바로 영상자료 콜렉션을 담당하고 있어 두 아가씨가 거의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만족스런 정보를 줄 수 있었다.
흐뭇한 심정으로 두 아가씨를 보내고 나서 몇 주전에 다녀온 동아시아 사서들의 미팅이 떠올랐다. 매해 있는 정기모임이지만 몇 년 전부터 바로 한류 이야기로 나를 즐겁게 하는 일들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곳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국분야 사서들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분야 사서 자신들의 이야기와 그 주변 경험담들을 들으면 절로 신명나는 한류의 영향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나 자신 작년에 히잡(이슬람여성의 두건)을 두르고 ‘풀 하우스’를 빌리러 한국학 도서관을 찾아왔던 두 학생과 한국고서를 보러간 한 대학의 책방에서 권상우의 ‘슬픈 연가’를 즐겨보고 있다는 백인 아르바이트 학생을 만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88 올림픽때 한국과 미국의 권투경기를 보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국을 응원해 함께 보던 시집식구들을 경악하게 했던 아들이 대학에서 한국역사 과목을 듣고 시무룩한 얼굴로 한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한국역사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역사인지 미처 몰랐어요.”
문득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그 고통 속에 우리의 삶을 버텨준 사랑의 힘을 그 힘든 세월을 지켜온 만큼의 지혜로 감동 있게, 또 재미있게 그려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시아 뿐 아니라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한류열풍이 지속되길 바라면서 나 자신도 나름대로 한류에 일조를 하며 살고 있다는 즐거운 생각을 해본다.
김선윤 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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