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은 그쳤다. 미국을 잠재웠다. 일본을 두 번 내리 이겼다. 그러나 세 번째 판을 내줘 결승엔 못나갔다. 무패의 연승행진이 ‘6’이라는 숫자에서 멈춘 것이다. 그래보아야 볼게임이다. 애써 자위한다. 그런데도 진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감동의 드라마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런 심정 때문인가. 한 판 한 판이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다. 팀워크와 투혼으로 강한 상대를 잇달아 무너뜨리는 팀 코리아. 한국인만 열광한 게 아니었다. 세계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한 단어가 떠올려진다. ‘한류’(韓流)라는 단어다. 이제는 식상할 정도다. 그런데 ‘한류란 무엇인지’ 그 질문이 새삼스레 머릿속을 맴돈다.
“한류란 우리가 식민지, 분단, 파행적 자본의 세월을 견뎌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가까스로 수직이동, 중심부의 배제와 착취의 논리를 피눈물로 익히며 자본의 세계화라는 각축 속에서 겨우 따낸 상가 입주권, 세계 문화시장이라는 쇼핑몰에서 어렵사리 연 작은 점포, 혹은 방금 찍은 명함 한 장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백원담 교수가 내린 정의다.
‘어쩌면…’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월드클래식베이스볼에서의 한국 팀이 맞은 상황과 너무 흡사해서다. 미국과 일본 틈바구니 속에서 이제 막 교두보를 내린 게 한국 야구이기 때문이다.
한류라는 현상을 그는 거대한 세계화, 자본주의의 종속물로 파악하고 있다. 세계화란 미국 중심의 큰 흐름에서 한국이 건진 작은 문화적 파편 정도로 보았다. 이처럼 미국이나, 일본의 자본주의 속성을 이어받은 천박한 모방성 문화현상으로 일단은 진단한 것이다.
상당히 비판적 시각이다. 그렇다고 비관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다. 한류는 이제 막 일기 시작한 문화현상이다. 때문에 그 잠재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류를 통해 한국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화의 시원지로 재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가 제기한 주장이다. 말하자면 불행했던 과거를 벗고 평화공존의 관계지향으로 나갈 때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문화로서 한류의 가능성을 내다본 것이다.
배타적인 한류는 안 된다는 거다. 열려 있는 자세, 보편타당성을 향해 나가는 한류 일 때 그 잠재력은 엄청나다는 말이다. 관련해 연상되는 게 있다. 18세기 전반, 그러니까 조선조 영조(英祖)대를 대표하는 시인 사천(?川) 이병연(李秉淵)과 관련된 일화다.
한 지인이 이병연의 집을 방문했다. 서재 가득히 쌓인 중국서적을 보고 놀라 어떻게 구했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친구 정선(鄭敾)의 덕이다. 그의 그림이 중국에서 고가로 팔린다. 친구인 관계로 그의 그림을 많이 얻었다. 사행으로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정선의 그림을 팔아서 책을 사오게 해 모았다.”
정선의 호는 겸재(謙齋). 진경(眞景)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생지기인 당대의 대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의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이 당시 북경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겸재의 그림이란 게 그렇다. 조선을 그렸다. 그의 그 유명한 진경산수화법이란 것도 그렇다. 오직 조선의 산천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화법이다. 이 조선의 그림을 당대 중국의 예술애호가들은 앞 다투어 비싼 값에 사들였던 것이다.
200여 년 전의 한류현상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문화자존의식’의 결과다. 한 국내 사학자의 설명이다.
진경시대란 조선사회가 임진, 병자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이루어낸 시기다. 이 시대는 외래 사상인 성리학이 오랜 세월 되새김질을 통해 조선풍토에 맞는 신사상으로 재정립된 때다.
확고한 문민전통위에 평화를 추구해온 조선이야말로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이라는 자부심이 팽배한 시대였다는 얘기다. 이 같은 시대배경에서 개화한 조선 고유의 문화는 세계화를 이룩했고 그 결과 당대 최고급 문화의 소비자, 중국의 사대부들에게도 공감을 샀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문이 있다. ‘성리학의 토착화’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서구정신의 한국화다. 어설픈 카피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근본 정수를 되새김질해 터득하는 걸 말한다.
그 역할은 일부나마 코리안-아메리칸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해외파의 활약으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수직이동 한 한국 야구를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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