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 말이던가. 잘난 맛에 사는 사람, 못난 맛에 사는 사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잘난 맛에 산다. 이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나보란 듯이 살아가고 있다. 그게 그리고 바로 나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못난 맛에 산다. 언뜻 이해가 안 간다. 무슨 말인가. 설명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종교인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한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자꾸 눈에 띤다. 진리라고 할까, 절대자라고 할까. 그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더 그렇다. 그래서 못난 맛에 산다는 것이다.
영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을 꼽으라면 어떤 책을 들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아니다. 일부 역사가에 따르면 킹 제임스판 성경이라고 한다. 이 영어 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영국은 영어로 표현하면 ‘트랜스폼’(transform)되는 경험을 겪게 됐다는 것이다.
말씀이 말하자면 한 민족, 한 국가사회를 통째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도 그런데 잘 변하지 않는 게 있다고 한다. ‘잘난 맛에 사는 정도가 중증’에 이른 사람이다.
똑같이 말씀을 들었다. 못난 맛에 사는 사람은 바로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못난 점을 더 깊이 깨닫는다. 중증일 정도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그 말씀을 절대로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남이라면 몰라도. 때문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거다.
부연하면 이렇다고 한다. 한 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말씀이다. 그런 말씀이지만 내가 아닌 남에게만 적용할 때 자칫 독약도 될 수 있다. 교회가 몸살을 앓는다. 깨어지기도 한다. 그 까닭의 많은 부문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이다. 말씀은 선포되지만 나 아닌 남에게만 적용하는 데에서.
말이 길어진 건 다름 아니다. 교회 밖의 세상살이에서도 이치는 비슷하지 않은가 해서다.
도덕적으로 결함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다. 한 마디로 반듯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분이 한 마디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듣는다. 삶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분의 말씀도 자주 듣다보면 싫증을 낸다. 말씀 중에 요구되는 도덕수준이 너무 높다. 그러므로 쉽게 싫증을 내고 피하는 게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다. 도덕적이지도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사람이 말마다 외치느니 인륜에, 도덕이다. 말인 즉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족족 옳다. 이런 사람들이 많을 때 삶은 피곤해진다.
도덕적이지도 못하면서 도덕을 내세우는 사람들, 이런 인간형은 그러면 어디서 많이 발견될까. 민주화에 앞장 선 공로가 있노라고 거들먹거리는 한국의 정치인들에게서가 아닐까. 마치 버러지를 보는 듯 눈빛은 혐오에 차 있다. 게다가 항상 경멸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가르치고 야단치려는 자세다. 민주화 공로자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기득권층이란 사람들’에게 보이는 태도다.
문제는 이들이 권력을 쥐었을 때다. 스스로를 도덕의 화신인 양 여기기 때문이다. YS, DJ 정권시절, 그러니까 문민시대 개막과 함께 싹터온 게 그 증세다. 누가 우리의 도덕성을 의심할 것인가. 그 자긍심에 권력이 더해지면서 자만의 고개가 뻣뻣이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증세가 날로 도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리고 가치관 비슷한 하나의 버릇까지 생겼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가치관이다. 자신들의 부도덕이 문제가 되면 ‘너희 기득권층은 더 해먹었잖아’ 하고 일갈하면 되는 그런 것 말이다.
그 증세는 자기최면의 결과이기도 하다. 하여튼 내가 하는 건 다 옳다. 여론이 안 좋아도 내 탓이 아니다. 그건 국민이 무식한 탓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증상이 여론무시다. 오만과 독선으로 내면의 자아가 똘똘 뭉쳐진 데서 나타나는 중증의 증상이다.
도덕성을 유난히 강조해 왔다. 대통령의 20년 지기 비서관이 스캔들에 관련되자 읍참마속(泣斬馬謖)을 운위하며 엄정처리를 요구했다. 공직자는 백로(白鷺)처럼 깨끗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리고 평소 국회의원 보기를 뭐 보듯 했다. 누구를 말하나. 이해찬 총리다.
이런 이 총리의 스캔들로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다. 명석한 해명은커녕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만 늘어놓아 의혹만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자기최면이 무서운 건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치명적인 암도 말기에는 자각증세를 느낀다. 그 때는 이미 늦었지만. 자기최면 증세는 그렇지가 않다. 소신성 착각이라고 했나. 그 병은 그래서 ‘강력한 말씀’으로도 치유가 힘들 정도다.”
해답이 됐는지 모르겠다. 한 마디 덧붙이면 코드인사와 독선의 정치가 보이는 말기증세라고나 해야 할지….
옥 세 철
논설위원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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