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일 끝나면 그 길로 교통체증 뚫고 달려가 저녁 준비하고, 치우고, 아이들 숙제 봐주고, 다음 날 먹을 음식 장만하고 … ‘바쁘다, 바빠’‘죽을래야 죽을 시간도 없다’며 동동거리다가 가끔 그런 불평들을 쑥 들어가게 만드는 주부들을 만난다.
‘맞벌이를 해도 왜 이렇게 매일 쪼들릴까’‘돈 잘 버는 남편을 만났어야 하는 건데…’하며 삶에 대해 툴툴대던 투정을 한순간에 머쓱하게 만드는 여성들이 있다. 남편이 뇌졸중, 간 질환, 뇌종양 등으로 쓰러져 몇 년째 병석에 있는 주부들이다.
지난 주말 LA 한인타운에서는 10여년 남편의 병시중을 들던 40대 중반 여성이 남편과 13살 난 아들까지 데리고 생을 마감해버린 가슴아픈 사건이 있었다. 처음 화재사고로 보도되었던 그 사건이 일가족 동반자살로 발표되자 특히 안타까워한 사람들은 그 주부들이었다.
“남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나도 남편 붙들고 ‘차라리 같이 죽자’고 했던 적이 여러번 있었어요”“그래도 너무 모질어요. 죽을 힘 있으면 살 힘 있다고 했는데…”
그리고는 동병상련의 그 주부들은 말끝에 한마디를 붙였다 - “한국남자들 다 그렇잖아요”
‘병 수발’과 ‘한국남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국남자’로 지칭되는 이민 1세 중년남성들의 욱하는 기질, 평생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중 받아온 버릇, 가부장적 남자 자존심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이 병들면 더 심해져서 간호하는 가족, 특히 배우자를 이중 삼중으로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민을 기준으로 할 때 우리의 평균수명은 77.5세이다. 2003년 현재, 남성의 평균 수명은 73.9세, 여성은 80.8세로 나와 있다. 하지만 질병이나 장애 없이 정상적 활동이 가능한 기간만 꼽은 건강 수명은 67.8세(남성 64.8세, 여성 70.8세)이다. 병석에 누워 타인의 간호를 받으며 지내는 세월이 평균 10년 정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개 남편 보다 아내가 젊고,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다는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하면 부부 중 배우자의 병시중을 받을 사람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자녀들이 독립하기 이전에 가장이 덜컥 쓰러지면 당장 닥치는 것은 경제적 곤란이고, 무거운 짐은 온전히 아내의 몫이다. 생계를 이끌 책임, 환자 의료비 부담만도 힘겨운 데, 식이요법에 따른 환자음식 조리부터 환자를 수도 없이 눕히고 일으키며 시중들기, 목욕시키기 등 집안에서 할 일은 또 몇 배로 늘어난다.
LA 다운타운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60세의 한 여성은 결혼한지 12년 되던 해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후 18년간 남편 병간호를 했는데, 4~5년전 세상을 떠나기까지 마지막 4년 동안 남편은 하반신이 완전 마비상태였다. 꼼짝 못하고 누워있다 보니 욕창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당뇨가 오고, 마지막에는 치매까지 왔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힘든 세월이었다. 하지만 더 힘든 건 정신적 스트레스였다고 그는 말한다. 병으로 인한 고통과 좌절, 가장으로서 역할을 못하는 데 대한 자괴감,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분노 등을 남편은 한국남성 특유의 욱하는 기질로 터트려 집안을 한바탕씩 뒤집어 놓곤 했다. 귀가시간이 조금만 늦으면 ‘남편을 무시한다’며 머리채를 휘어잡기 예사였다.
“그냥 병 수발만도 힘든데 환자가 들들 볶으니 견디기가 힘들었지요. 그 모두가 생에 대한 애착, 집념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역지사지(易地思之)-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연습은 집안에 환자가 생겼을 때 특히 중요하다. 환자는 간호하는 가족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가족은 몸져누운 사람의 답답함, 괴로움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10년째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며 가사를 꾸려나가는 한 여성은 말했다.
“결국은 사랑이에요. 환자가 투병하는 게 약으로만 되었겠어요? 가족의 사랑이 있으니까 버티는 것이지요”
나이 들수록 병 수발 받고, 수발을 드는 일은 현실로 다가온다. 건강할 때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
권정희 논설위원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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