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사건으로 한국에서 반미 촛불데모가 휩쓸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그 바람을 타고 대통령이 됐다. 그 후 지금까지 한미관계는 바람 앞에 촛불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양국 관계자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한미우호를 강조했다. 두 나라의 정상이 여러 번 만나기도 했고 외교 실무자들은 더욱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그렇다면 한미관계가 잘 돼가고 있는가. 요즘 새로 문제가 된 북한의 지폐위조에 대한 상반된 자세를 보면 한국과 미국이 끝까지 한 길을 가기는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이 미국의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대량 위조하여 유통시키고 있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대단히 큰 문제이다. 미국의 경제를 교란시킬 뿐 아니라 세계 통화인 달러화의 신용을 떨어뜨림으로써 세계 경제를 교란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의 지폐 위조에 강력 대응키로 하고 세계 각국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북한의 달러 위조행위가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미국 입장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증거를 제시했음에도 한국이 증거를 회의적으로 보는 것은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북한의 입장을 두둔해 주려는 심정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미국,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과 북한간의 애증관계나 친소관계는 이미 정형화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북한을 가까이하려고 하고 미국은 북한을 나쁜 나라로 생각한다. 북한은 미국이 자기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원수라고 여긴다. 이런 감정이 금년도 한미 정상의 시정방침에서도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는 북한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압박을 가하고 때로는 붕괴를 바라는 듯한 미국 내의 일부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미국 정부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한미간에 마찰이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틀 뒤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세계 인구의 절반 남짓이 민주국가에 살고 있으나 우리는 시리아, 미얀마, 짐바브웨, 북한, 이란과 같은 나머지 비민주국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가 요구하는 평화와 정의는 이들 나라의 자유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또 그는 “독재정권들은 테러리스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과격주의를 조장하며 대량 살상무기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폭정의 종식이라는 역사적이고 장기적 목표를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나쁜 나라이고 이런 나쁜 나라는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이렇게 볼 때 한미관계에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이 당장 적대 관계로 돌아설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장기적으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관계이다. 마치 틈이 벌어지고 있는 부부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이 결혼 후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오다가 한국에 북한이라는 존재가 애첩으로 등장함으로써 금이 가게 된 것이다. 한국은 날이 갈수록 북한에 애착을 더 갖게 되고 그럴수록 미국은 행실 나쁜 북한을 미워하게 되고 북한은 남한에 바짝 붙으면서 미국을 적대시하고 있는 상황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만약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국과 미국이 갈라서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아니 그보다도 갈라서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까. 지금까지 한미간에 서로 얽혀있는 관계가 파괴되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고 한판 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한미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한미 두 나라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한가지 방법은 한국이 북한에 대해 맹목적으로 접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남북미의 3각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에 미국과 전적으로 코드가 맞지 않는 정권이 계속 집권하여 이와 같은 정책적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국은 좌경정권을 축출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미국과 결별을 하느냐는 두 가지 선택 중 어느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기영
뉴욕 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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