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은지 벌써 2주가 되고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새해 계획을 세워 놓고 고군분투하며 지키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과 달리 작심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쌓이기에 근래에는 무계획을 계획으로 세워 놓았다.
몸에 배인 게으름으로 타성에 젖어 소홀해지기 쉽고, 내가 뭘 이루려고 해도 도와주는 분의 은혜가 없으면 소용없음을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마음만이라도 평안을 주고 싶었다. 하루 단위로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가니 크게 실망할 것도 없고 오히려 충실히 보낸 하루에 감사하게 된다. 계획이 없다고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낸다는 뜻이 아니다. 집착하지 않고 무엇이나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는 의미이다.
계획은 없어도 유심한 마음 한 자락은 담고 있다.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이다. 일상 생활과 늘 함께 가는 생각이기에 계획 이상으로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근동에 한인 마켓이 들어온 이후 생활은 편해졌으나 가까이 있기에 허술해지기 쉬운 점도 있다. 입던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무심히 나서는 것이다. 적당히 풀어져 살던 나에게 드디어 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에 모임에서 가끔 보던 A부인을 어느 늦은 저녁에 한인마켓에서 만났다. 평소 수수하기 이를 데 없던 그 부인이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숄까지 곁들여 성장한 모습이었다.
남편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며 반색을 한다. 그날 따라 A부인은 우리집 온 가족의 안부를 차례로 물었다.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벌에 쏘인 사람같이 허둥대며 마켓을 빠져 나왔다. 단정함은 또 다른 교양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날 나는 단정치 못했다.
몇년전 온열기라는 것이 선보이기 시작하여 각 보급소에서 무료로 시술해준다고 선전이 한창일 때이다. 허리디스크로 고생하고 있는 나에게 그곳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만병통치라는 이 물건을 소개했다. “40분동안 누워있으면 전신을 골고루 스치며 뜨끈뜨끈하게 마사지 해주고-”하며 선전원이 되어 열을 올린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남편은 내게 그 만병통치에게 한 번 몸을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나도 평소 호기심이 일던 터라 따라 나서려 옷장 문을 열었다. 그때 남편이 차타고 가면 그 앞에 내릴 텐데- 하며 서두르기에 자켓을 걸치고 차에 올랐다. 거울에 흘낏 본 화장기 없는 얼굴은 병색이 돌았다.
밸리 온열기 점에 도착하니 홀 안에 대 여섯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가져간 책에 눈을 주었다. 그때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동네 사람인듯 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음성 같아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한국에서 큰아이 초등학교 2학년때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서울을 떠난 지 20여년 만의 반가운 만남인데 정면으로 대하기가 부끄러웠다. 다행이 곧 내 차례가 되어 허겁지겁 인사를 하고 온열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온열기에 누웠으나 형틀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이 두 사건은 나태해져 있는 삶에 변화를 주었다. 결국 예의를 잃지 않음이란 남에게 보이기에 앞서 자신에 대한 기본 도리일 것이다. 예의는 사람이 행하여야 할 올바른 예와 도, 즉 정신 상태의 바름을 의미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단정하게, 멋있게, 여유있게, 로맨틱하게 라는 단어에 유심한 마음 한 자락을 담으려고 더욱 노력하여야 겠다.

유숙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