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옷장을 열고, 아이가 마지막 입을 옷을 챙기는 부모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아이의 방에 홀로 앉아있는 부모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먼지만 쌓이는 스케이트보드와 자전거를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아이의 자동차를 딴 사람이 사서 몰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
며칠전 우리 동네 시립 TV 방송을 보니 한 중년 여성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슴 저린 연설을 하고 있었다. 행사는 음주운전 예방 캠페인, 그 여성은 술 취한 운전자로 인해 10대의 아들을 잃은 어머니였다. ‘Can you imagine …’을 계속 반복하며 아들 잃은 슬픔을 토해내는 그 어머니의 연설에 강당을 가득 메운 열 예닐곱 살 청소년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자식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부모 앞서 가는 일이라고 했는 데, 새해 벽두 남가주의 한인가정에 또 그런 슬픔이 닥쳤다. 사이프러스 고등학교 12학년에 재학 중이던 17살 소년이 또래 청소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후 사건 발생 3일 만인 지난 2일 숨졌다.
한인 샤핑 몰에서 한인 청소년들 사이에 일어난 패싸움이라는 사실, 우발적 싸움이 격해져 사망까지 몰고 왔다는 사실, 숨진 소년은 평소 귀가 시간 한번 어긴 적 없는 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사실 등은 10대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남의 일 같지 않은 충격을 준다. 싸움의 도화선과 하등 상관없는 소년이 ‘하필 그 시간, 하필 그 장소’에 있었던 우연 때문에 화를 입은 것이니 그런 우연으로부터 안전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10대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들이 항상 조마조마한 것은 상당 부분 그런 ‘우연’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우연한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있지만 10대 청소년들은 그 가능성이 유난히 높다는 점에서 부모들의 불안은 근거가 있다.
주위에서 10대들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해보면 아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환점을 맞는 것은 16살이다. 16살이 되어 운전을 하게 되면서, 혹은 운전하는 친구들을 갖게 되면서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운전으로 얻은 물리적 이동의 자유, 호르몬 변화로 인한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충동들, 그리고 동년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소속 욕구가 아이들을 종종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장소로 몰고 간다.
아울러 중요한 요인은 심심함에 대한 제로 톨러런스이다. TV와 게임, 인터넷 등 초 단위, 분 단위로 바뀌는 매체들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지루함을 절대로 못 참는 특징이 있다.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은 종종 청소년들의 탈선 혹은 사고의 도화선이 된다.
지금은 대학에 재학 중인 한 한인 여학생의 몇년전 경험이다. 12학년 봄, SAT 시험을 마치고 난 어느 토요일이었다.
“너무 심심했어요.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집에 없더군요. 그래서 전에 몇번 만난 적이 있는 다른 학교 친구 집에 놀러 갔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 남자아이들 몇 명이 그 친구를 찾아오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그들이 차편이 필요하다고 해서 운전을 해주었는데 그곳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운전자도 사건 연루자로 경찰조사를 받게 되었다. 싸움을 한 청소년들과는 전에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지만 하필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모든 우연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할 능력은 부모에게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능한 한 우연한 말썽에 끼여들지 않도록 보호막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은 세심한 관찰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사건으로 드러나기 오래 전부터 징후를 보이기 마련이다. 아이의 감정상태, 교우관계 등을 관심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운동, 과외활동으로 아이를 바쁘게 만들어 잡념이 파고들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 참고할 것은 한 아버지의 경험.
“아이와 쓸데없는 걸 많이 하는 거예요. 그냥 같이 뒹굴며 노는 것이지요. 부모와 많이 지낸 아이는 잘못 되지 않아요”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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