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고 가까이 멕시코 국경을 향해 달리다보면 눈에 띄는 교통 표지판이 하나 있다. 마치 숲길을 달릴 때 사슴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는 사슴그림처럼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가 달리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표지판이다.
야밤에 국경을 넘어오는 가족이 자동차에 치이는 일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삶의 급박함과 비애, 생존과 희망, 좌절이 느껴지며 표지판 하나가 지닌 극적인 예술성을 느낀다.
LA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라틴 아메리칸과 멕시칸들은 우리들 삶의 곳곳에 함께 하고있다. 마켓에서는 한국말 잘하는 멕시칸들이 함께 일하고 한인타운과 그 주변에서 어디서나 쉽게 멕시칸들을 만날 수 있다. 맥아더 팍 호수주변의 알바라도 가는 가장 활기찬 멕시칸들의 거리이다. 관찰하는 게 버릇인 나는 늘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항상 느끼는 것이 멕시칸들은 눈빛이 선하고 따뜻하며 좀 더 깊이 시선이 어디든 머문다는 점이다.
문화가 삶의 방식이라면 그들은 LA 삶의 문화를 곳곳에서 빛나게 하고 풍요롭게 하며 사람 사는 곳 같이 느끼게 한다. 가난의 은총이 주는 삶의 활기. 엄마와 함께 걷는 아이들.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 특히 웃음 짓게 하는 것은 살이 뒤룩뒤룩 찐 여인들이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태연히 걷는 모습이다.
색색의 과일을 깎아서 쌓아 놓은 작은 진열대 위에는 꼭 색동의 우산이 있고 깍은 머리에 턱없이 넓은 통바지를 입은 소년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기도 한다. 땡볕에 서서 꽃을 파는 소년 소녀의 한없는 인내는 언젠가 꼭 그리고 싶다.
곳곳에 낙서와 벽화가 있고 느닷없는 노란색으로 건물을 칠해놓기도 한다. 세차장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침묵에 찬 노동. 연장이 가득 찬 낡은 트럭을 몇몇이 타고 가는 모습. 홈디포 앞에서 그들은 군상을 이루며 노역을 한다. 유유하고 무심한 모습들이다.
잘 정비된 프리웨이, 심심한 도로표지판, 걷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풍요와 빈곤의 미국 문명을 살면서 때로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인가 의문 할 때가 있다. 사람이 이런 문명에서 일생을 보내고 죽는다는 건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여행이나 이주를 꿈꾸기도 하는데 그때 생각나는 것이 바하 캘리포니아이다.
바다가 보이는 소박하고 가난한 거리. 3시간만 운전하면 바로 멕시코국경을 넘어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모습이 전개된다.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는 도로와 풍경의 완전한 변화. 진분홍 노랑 등 강렬한 색조로 칠해놓은 건물들이 바다의 풍경과 함께 서 있고, 장터에 오가다 기도할 수 있는 의자가 열 개정도 있는 작고 예쁜 건축양식과 소장품이 최고 수준이다.
내가 믿기로는 멕시코는 문화대국이다. 일전에 LA 현대미술관(MOCA)에서 금세기 최고의 화가라는 영국화가 루시안 프로이드의 전시가 있었다. 우연히 그 전시를 본 다음날 멕시코시티의 현대미술관을 방문 했다.
지독히도 암울하고 철저하게 소외된, 오로지 육체의 끔찍한 실재에 의존하고 탐닉하는, 갈데까지 간 현대 유럽인들의 암울한 전라의 초상들을 보며 현대 유럽문명의 숨막힐 듯한 무게를 느끼며 MOCA를 나온 나에게 멕시코 현대미술관의 그림들은 대담한 활기와 스케일로 희망을, 인간과 자연, 문명의 조화를 숨쉬게 했고 전 세계 뮤지엄 중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현대미술관과는 비교가 안되는 격 높은 뮤지엄이었다.
잉카문명의 후예들로서 대통령관저의 입구 벽을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로 가득 채우고 누구든 드나들게 활짝 문을 열어 놓은 나라. 가는 곳마다 색채가 찬란하고 심성이 깊고 따뜻한 나라. 프리다 칼로의 청색 뮤지엄이 있는 아름다운 카요티 거리에 설 수 있다면 우리가 늘 가까이 살고있는 멕시칸들이 찬란한 문명과 문화의 나라 사람들임을 깨닫고 진정한 우애와 존경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박혜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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