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탁자 위에 놓인 큰 화병 속의 장미 다발이 화려한 자태로 주위를 제압하며 보내온 이의 넉넉한 마음처럼 자신있는 미소로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내 생일을 앞당겨 만났을 땐 듬직한 몽우리가 조신해 보였는데 하루하루 몸을 풀면서 단조로운 공간에 농염한 액센트로 자리 매김해 간다. 찌뿌듯한 동작으로 눈 맞추는 아침이면 진홍의 꽃잎을 열고 반기는 황홀한 생기가 미처 정비되지 않은 내 마디를 신성하게 자극하여 설레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아이 엠 오케이’를 입속으로 뇌이면서. 가까운 지인 김 여사의 거처는 늘 손 댈 것없이 정돈되어 있어 그 부지런함에 감탄하는데 키우는 식물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음을 알았다.
물주고 영양제 주고 잡초솎는 일반적인 손질 의로도 자상한 대화를 건네고 있었다. “잘 잤니? 이제 밥 먹자” 엄마가 어린 자녀에게 하듯 여기저기매만지며 다정한 말씨다.
정해진 오전 일과의 자원봉사로 외출할 시간이 됐다. “이제 나가야 하는데 집 잘 보고있어요.” 그리곤 녹음기를 틀어 놓는다. 그녀가 돌아올 때쯤엔 음악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혼자 심심치 말라고, 또 화초에 기쁨을 주기 위함이리라. 그리곤 반드시 잘 있었냐는 말을 주고받으며 다독인다고 한다. 사람뿐 아니라 생명체인 동식물에도 정서반응이 있음을 실험을 통하여 발표된 적이 있다. 말은 통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정겨운 호흡에 화답하고 순응하는 동물들, 아름다운 찬사와 음률에 잎을 떨며 기뻐하는 화초들, 더 나아가서 맺어진 인연의 의리로 위급함에 맞서는 사육 동물과의 훈훈한 관계 등. 세포의 조직으로 성장하는 모든 생체의 유기성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언니 집에서였다. “자, 이제 자러가자”며 산세베리아의 매끈한 화분을 안고 방에 들어가던 언니가 돌아본다. “내일 아침엔 다시 여기에 내어 놓거든.” 공기정화의 음이온 방출의 효과도 계산된 보살핌이겠으나 반들반들 윤택있는 이파리의 싱싱함에서 섬세한 그의 정성을 볼 수 있었다. 워싱턴주에서 방문한 조카 영혜가, 그의 어머니가 사는 노인 아파트에서 발견한 색다른 변화를 들려주었다. 각방의 현관 손잡이에 갸름한 표지판이 걸려 있었는데 ‘I am OK’라고 써있었다. 그게 뭔가 했더니 입주자의 안부를 점검하는 것이었다고.
그 사인을 보면 ‘무사하구나’ 안심하고 뒤집어 놓는다고 한다. 만약 그 표지판이 보이지 않으면 문을 두드려서 확인한다나. 더러 내걸어 놓은 것을 잊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지만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층마다 세 집씩 팀이 되어 서로 안전을 돌보고 있으므로. 몇해전에 모 노인 아파트에서 사후 며칠만에 시신을 수습한 일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던 이웃의 신고로 매니저에 의해 발견된 것이었다.
비슷한 사건이 여러곳에서 발생하기에 정기적인 전화나 방문을 권장하고 있지만 특별히 가까운 사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조용히 지내는 외로운 분들의 동향은 더욱 알기가 어렵다. 그런 연유로 생긴 아이디어이겠는데 어떤 분의 착상으로 팻말을 만들어서 챙기게 된 것이다. 시간과 비용을 혼자 도맡고 실행 방법을 가르치며 익히게 한 그분의 노력과 적극성이 존경스럽다.
“어머니 어떠세요.” “해피 버스데이.” 타주의 가족들 음성이 전선 넘어 바쁘다. 한국의 국경일과 겹치는 내 생일이어서 기억하는 이들도 축하를 보내온다. “그래 괜찮아, 잘 지내고 있다.”의 평범한 대답을 억양을 살짝 높이고 어두를 바꾸었다. “아이 엠 오케이” 같은 뜻의 말인데 스스로도 경쾌하고 씩씩한 듯 여겨졌다. 조카 영혜의 말을 듣고 그곳에 가 보았었다. 라미네이트 한 작은 표지에 찍힌 ‘I am OK”가 양 귀퉁이에 대각으로 삽입한 단순한 선과 어울려 조촐하면서도 귀여웠다. 그래서 그것을 디자인한 그분의 재치있는 안목과 따듯함이 잔잔한 감동으로 받아들 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표지용도에 대입시킬만한 우리말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건재합니다’, ‘무사해요’보다 다섯 글자의 영자 표기가 훨씬 부드럽고 애교스럽다. 주변에서 흔히듣던 일상적인 용어인데, 무거워질 수 있는 상황을 털고 가볍게 압축한 표현이 재미있다. 88세인 여전도사님의 영어 활용 기지라니! 많은 노인 아파트의 독신 거주자들에게 필히 권장할만한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불의의 사고에 대응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모범적인 공동체이다.
최상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듯 만개의 장미 앞에서 나오는 오늘도 조용히 속삭여 본다.
‘아이 엠 오케이.’
이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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