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전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가 여성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기사가 나간 직후 그 신문의 독자란에 벌집 쑤셔놓은 듯 여성들이 열띤 의견을 쏟아내었고, 한인 2세 여성들도 E-메일로 기사를 주고받으며 서로 의견을 나눴던 것 같다. 내 주위만 보아도 20대 중반 전문직에 종사하는 딸로부터 기사를 전해 받은 엄마들이 여럿 있다.
기사는 미국 최고의 엘리트 여대생들이 커리어 대신 현모양처라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주저 없이 택하는 변화된 분위기를 전달했다. 하버드, 예일 등 아이비리그에 들어간 여학생들이라면 미국 사회 각 분야에서 리더로 창창하게 뻗어나갈 재원들인데 그들이 힘들게 닦은 실력 다 버리고 ‘그냥 엄마’가 되는 데 대해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예일대학 여학생 138명을 인터뷰한 결과에 의하면 60%에 달하는 85명이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기꺼이 커리어를 접고 집안에 들어앉겠다”고 했다. 이들 중 파트타임으로 일을 줄이겠다는 수와 전업주부로 자녀 양육에만 전념하겠다는 수는 반반 정도였다.
이전 세대 엘리트 여성들을 투사처럼 만들었던 페미니즘 문제의식이 신세대 여성들에게서 희미해지는 변화는 수년 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한인 가정의 딸들 중 고등학교, 대학교 때 쟁쟁하게 날리던 여성이 결혼하자 전업주부로 눌러 앉아, 갈고 닦은 전문분야 실력이 남 보기에도 아까운 케이스가 더러 있다.
학력과 실력을 갖춘 여성이 커리어를 버리고 집안에 들어앉을 때는 그 조건과 이유가 비슷하다. 부부 맞벌이가 필요 없을 만큼 풍족한 재정적 조건,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키우겠다”는 엄마로서의 사명감이다.
젊은 세대의 의식 속에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젊은 여성들이 사회적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삶의 방향을 틀어 자녀 키우는 일에 헌신하는 모습은 어머니로서 아름답다.
그렇기는 해도 여성이 여전히 ‘소수계’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사회적으로 할 일 많은 엘리트 여성들의 이런 결정은 단순히 개인사나 남의 가정사로 넘길 수 없는 측면이 있다.
20세기는 여성들이 먼길을 달려온 세기로 기록된다.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전진해 나아가려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걷거나 뛰어갈 ‘체력’, 그리고 ‘길’이다. 지난 세기 교육의 기회가 열리면서 여성들은 이 사회에서 역할을 맡을 만한 ‘체력’을 얻었다.
문제는 길이었다. 뛰어갈 힘은 생겼는데 길이 뚫려있지 않았다. 길 없는 길 앞에서 많은 여성들은 좌절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용감한 여성들이 한 뼘 한 뼘 길을 닦은 덕분에 여성들에게 오늘의 지평이 열렸다.
‘여성이다’는 것이 고용 거부 이유로 충분했던 시절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연방 대법관 후임으로 지난 주 조지 부시 대통령이 극찬하며 지명한 해리엇 마이어스(60)도 70년대 초반 취직이 안돼 좌절하던 긴 시간이 있었다. 남부 명문 법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실력을 들이밀어도 법률회사들은 그를 여성이라고 외면했다.
그 보다 15년 선배인 오코너는 결국 한번도 변호사로 일을 해보지 못했다. 그가 스탠포드 법대를 졸업한 것은 1952년. ‘변호사’와 ‘여성’은 ‘자전거’와 ‘물고기’만큼이나 하등 상관이 없어 보이던 시대였다. 구직신청 하는 데마다 거절당하자 그는 10여년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다가 1965년 애리조나 주검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1981년 연방대법관이 되었을 때 오코너는 연방대법원 191년 역사상 102번째 법관이자 최초의 여성 법관이었다. 여성에게 대법원으로 통하는 길이 뚫리는데 거의 200년이 걸린 셈이다. 그래서 처음 부임해보니 그 건물에는 여자 화장실도 없더라고 오코너는 몇 년 전 회고했었다.
신세대 엘리트 여성들은 ‘여성 최초의 …’라는 기록을 일궈낸 많은 선배들에게 ‘길’을 빚지고 있다. 빚진 자로서 그들 앞에는 자신들 몫의 뚫어야 할 ‘길’이 놓여있다. 일하는 엄마들이 자녀에 대한 불안과 죄책감 없이 일할 수 있도록 근무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다. 가진 여성들이 못 가진 여성들을 위해 해야 하는 여성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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