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밤하늘을 바라보니 달이 벌써 많이 이지러져 있었다. 추석 지난 지 불과 사흘인데 하늘이 좁을 세라 두둥실 부풀었던 달은 그 사이 일그러져 반달에 가깝다. 차면 기우는 것 - 자연의 이치이다.
인생도 자연이어서 차면 기우는 법인데, 그 엄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우리가 보통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인생이라는 달이 기우는 속도이다. 초생달처럼 시작된 인생이 정점인 ‘보름달’에 이르는 과정은 한없이 느리게 느껴지지만 그렇게 힘들게 도달한‘보름달’이 기우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그믐달’이다.
“이지러지는 달과 같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중년이면 앞에 놓이는 숙제이다. 이번 주 신문사 일로 통화를 한 세 사람이 우연히도 모두 ‘남은 생애’이야기를 꺼냈다.
첫 번째는 60대 초반의 남자 의사. 그는 요즘 조기 은퇴를 생각 중이라고 했다.
“주변에 죽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요. 이제는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죽음이 조부모 세대에서 부모 세대로 내려오더니 어느새 나의 형제, 친구, 동창들에게 들이닥치면서 나를 압박해 오는 시점에 그가 서있다.
“너무 바쁘게 살다가 덜컥 들어앉으면 큰일이지요. 가보고 싶던 곳들 다 둘러보고, 해보고 싶던 것들 다 해보고 나서 죽어야 하지 않겠어요?”
두 번째는 60 전후의 여성 자영업자. 자녀들은 독립하고 비즈니스는 그런 대로 굴러간다.
“젊어서는 아이들과 먹고사느라 아무 데도 다닐 수가 없었어요. 이제 남은 생애는 내가 좋아하는 곳 찾아다니며 살고 싶어요. 올 가을에는 온천장을 순례할 계획이에요”
‘자녀들 자리 잡는 것 보고’‘은퇴할 자금 좀 더 마련해 놓고’하며 미루다 보면 체력이 달려서 나중에는 걸음 걷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부부 중 한 사람이 병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집안에서 비디오나 보며 여생을 마치기 십상이다”고 그는 말했다.
세 번째는 40대 후반의 여성 후배. 외동딸이 대학으로 떠나서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남는 에너지를 어떻게 분출할까 생각 중이에요. 뭔가 시작해야겠지요”
불교 설화 중에 안수정등(岸樹井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풀어보면 안수(岸樹)는 ‘강기슭의 나무’, 정등(井藤)은 ‘우물 속의 등나무’가 된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사나운 코끼리에 쫓겨 도망을 가다보니 강기슭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마침 나무 뿌리가 우물 속으로 뻗어있어 그는 뿌리를 잡고 우물 안으로 숨었다. 하지만 우물 속이라고 안전한 게 아니었다. 밑에서는 용이 불을 토하며 그를 삼키려 하고, 위에서는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 그가 매달린 나무뿌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흰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등나무 뿌리는 사람의 목숨, 우물 밑의 용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나무 위 벌집에서 꿀이 몇 방울 떨어지자 그는 꿀맛에 정신이 팔려 위급한 실상을 잊어버리는데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이 설화는 덧붙인다.
인생이 ‘보름’을 지나 ‘그믐’으로 접어들면 삶의 모습도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본다. 차 오르는 삶에서 가볍게 덜어내는 삶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서 성취감을 맛보고 이 생에서의 의무를 다했다면 이제는 존재 자체를 즐기는 삶으로 방향 전환을 할 때이다.
늘 하고 싶어도 못했던 일,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 못하고 죽으면 후회될 일은 내게 무엇인가. 은퇴하고 나면 집 팔아서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나이 70에 피아노를 배우는 할머니도 있고, 어려서부터 살았던 동네들을 모두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천사가 날수 있는 것은 존재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 일하고, 더 모으고 싶은 욕심, 내일에 대한 걱정이 납처럼 무겁게 달려 있으면 절대로 날아오를 수 없다.
‘해야 할 일’로 채워온 삶을‘하고 싶은 일’로 바꾸는 시점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 어느 시점에 은퇴를 하고 어떤 일로 여생을 보낼 것인가 - ‘시간의 설계도’를 만들었으면 한다. 흰쥐와 검은 쥐가 뿌리를 다 갉아먹기 전, 매달린 팔에 아직 힘이 남았을 때.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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