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나니 가을이 성큼 다가선다. 하늘빛이 시리도록 깊고 푸르다. 계절에 민감한 것은 살아있는 생물에게 모두 다 적용되는 듯 푸르고 싱싱하던 잎들이 더러 기운을 잃고 있다.
이 가을은 설렘으로 시작되었다. 여중 3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K 선생님이 수필 문학 강연 차 LA에 오셨다. 문학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먼 남쪽 바닷가에 사시는 C 수필가 댁에서 갖는 조촐한 모임이 있어 나는 한 시간이 넘는 먼길을 달려갔다.
생각보다 앞선 마음은 이미 개나리로 울타리 쳐진 붉은 벽돌의 본관 잔디밭에 앉아 있는 나를 본다.
50여 년 전 봄, 선생님은 대학을 막 졸업하시고 우리학교로 부임 하셨다. 국어 선생님으로 담임으로 소개받았을 때, 이상적인 한국 여인상이 바로 교단에 서 계셨다. 음성이, 자태가 고우실 뿐 아니라 전형적인 동양미인의 면모를 갖추셨다. 그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시를 읊어 주고 가끔씩 좋은 영화 이야기도 들려주고 문예반을 맡아 어린 시인들을 키워 내셨다.
부임하고 몇달후, 우리 반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좋은 방법을 제시하고 가져간 사람을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눈물을 흘리면서 칠판에 종례를 쓰고 계셨다. 가냘픈 어깨가 들먹일 정도로 흐느끼는 선생님의 뒷모습에 어떤 감동이 일었다.
C 수필가 댁으로 들어서는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변하셨을까. 연전에 엽서 내왕은 있었으나 실제로 뵙기는 졸업 후 처음이다. 그 댁 뜰로 내려서며 선생님을 찾았다. 그때 선생님은 어느분과 불빛이 명멸하는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담소하고 계셨다.
선생님과 나의 반가운 해후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그곳에 계신 분들에게 “나의 첫사랑이에요”하신다. 졸업 후, 첫번 맡은 담임 반 학생이었고 첫 정을 쏟았기에 첫 사랑이라고 하신 것이다. 선생님의 모습은 세월만 살짝 지나갔을 뿐, 자태, 음성, 미소, 가냘픔마저 예전 그대로이다.
어둠이 깔려 있는 그댁 너른 뒤뜰에는 가을을 연주하는 풀벌레 소리가 잠든 기억을 들추어 준다. 그 밤, 하늘의 별들이 몽땅 쏟아져 내린 것 같은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9월 초순, LA에 사는 동문 20여명이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 했다. 둥글게 앉아 있으니 누가 스승이고 제자인지 얼른 식별되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는 함께 늙어 가고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도 어른스러우셨던 선생님과 우리가 불과 8~9년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음에 한바탕 웃었다. 시계바늘을 왼쪽으로 돌리며 세월의 간극을 좁히고 있었다.
“심미안을 발달시켜라. 어떠한 환경에 처하여도 하늘을 바라보며 맑은 꿈과 높은 뜻을 키워라.”
국어시간이면 자주 들려주시던 말씀 따라, 언론인, 의사, 교수로 각각 전문 분야에서 내로라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이 자랑스러워 입이 다물어지질 않으신다.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어느 해, 활짝 핀 개나리꽃 한 아름이 졸업식장 피아노 위에 놓여 있었다. 한창 추운 2월인데 제일 먼저 봄기운이 찾아 들어 식장이 화사했다. 선생님은 첫 정을 쏟은 우리들의 졸업을 축하해 주시려고 그해 정월, 꽃봉오리도 맺혀 있지 않은 개나리를 꺾어서 온실에서 두달 동안 정성스럽게 키우셨다. 선생님의 사랑으로 우리들 가슴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대학 교수로 정년 퇴임하시고 근래에는 ‘그림 사랑회’라는 유화 모임 회원으로 9월 말에 두번째 전시회를 갖는다고 전하셨다.
“자연 앞에 다 털고 앉아 하나님의 축복을 온 몸으로 느끼며 아! 아름답다-. 저절로 탄성이 나와. 그날그날 보람있다는 일을 찾아서 새로운 생활로 이제부터 노년기까지 즐겁게 시간을 만들 거야.”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삶을 즐길 줄 아는 멋을 지닌 선생님은 인간의 향기가 물씬 나는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고 떠나셨다.
“서울에 오면 꼭 들르렴, 우리집 마당에는 지금 가을꽃이 한창이란다.”
선생님의 음성에는 가을 향기가 배어 있었다.
유숙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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