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민족을 지탱하는 정신적 뿌리는 모세의 십계명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담은 법궤를 앞세우고 적들을 쳐부수며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 그 고대의 전쟁에서 유대인들은 인종말살 작전이라고 할만큼 이민족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죽인다.
그래서 종종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십계명에는 분명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책도 없이 죽였는가, 그들은 계명을 어긴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이런 설명을 했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사람’은 그 부족 구성원, 즉 유대인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우리’인가 ‘그들’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와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다.
지난 10여일 뉴올리언스 수해 보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 것은 미국 안의 ‘우리’와 ‘그들’, 두 개의 분명히 다른 사회이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대피소에서 배고픔과 두려움, 분노와 좌절로 아우성치는 얼굴들을 보면서 눈물이 먼저 솟구치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이다. 그 구분이 TV로 보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이번 재해의 특징이다.
4-5년 전 흑인 민권 운동의 주축인 유색인종 지위향상 협의회의 크웨이지 엠푸메 회장은 미국의 주요 TV 방송국들을 상대로 엄중하게 항의를 했다. 주요 시간대에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이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후 ABC, NBC, CBS 등 방송사들이 유색인종 배우나 작가 기용을 늘리기는 했지만 TV 화면의 ‘백색의 물결’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TV가 주도하는 미국사회의 이미지는 백인 중산층의 안락한 모습이고, 그 틀에서 유색 인종들이 비집고 들어설 틈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번 카트리나의 강풍으로 미국의 전혀 다른 모습이 노출되었다. 풍요로운 백색의 미국이 아니라 가난에 찌든 검은색 미국이다. 연일 CNN 화면을 메우는 이재민들은 99% 흑인이어서 평생 TV에서 이렇게 흑인들을 많이 본 것은 처음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아울러 그들의 참혹한 상황에 흥분하며 분통을 터트리는 정도가 피부색에 따라 달라지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의 늑장 대응에 대해 흑인들은 ‘인종’이 원인이었다고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백인들은 구호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성적 입장이다.
인종도 구호 시스템도 원인이 되겠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마음’이라고 본다. 마음이 달려가는 속도이다. 우리 가족, 친척 … ‘우리’로 느껴지는 대상에 대해서는 빛보다도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마음이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꾸물거리고, 때로는 꼼짝 않고 멈추는 것이 마음이다.
뉴올리언스에서 이재민들이 도와달라고 울부짖던 지난달 30일 휴가 중이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컨트리 송 가수와 기타를 치며 흥겨워하던 모습, 아수라장 이재민 대피소를 찾아가 흑인 소녀를 껴안고 위로하는 오프라 윈프리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뉴올리언스 방파제가 무너진 날로부터 정확히 42년 전 마틴 루터 킹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명 연설을 했었다. 그의 네 자녀가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 꿈이라고 했다.
지금 미국은 그때로부터 얼마나 나아졌을까.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 인종분리는 법이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하지만 법보다 더 힘이 센 것이 있다. 바로 돈이다. 미국의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져서 소득별 최상위층 1% 인 270만명이 보유한 재산이 중하위층 1억명의 재산과 같은 수준이다.
소득에 따라 주거지역이 제각각 달라지면서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얼굴을 맞댈 일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인종분리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 ‘우리’와 ‘그들’의 2개의 미국이다. 정치가들은 국민 모두를 ‘우리’로 껴안으며 눈물을 닦아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카트리나가 드러내 준 미국의 숙제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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