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두번 마켓에 가는 것이 즐거운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음식 색깔이 다양할수록 건강식이라 하여 식탁을 빨강, 주황, 노랑, 파랑 색깔의 야채로 채우며 부터 발걸음이 잦아졌다. 갖가지 색채의 야채와 과일을 구입하여 다듬고 정리해 넣고 하는 날은 푸른 기운이 몸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요즈음 마켓들은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고 일목 요연하게 물품들을 진열해 놓아 같은 물건이라도 질을 비교하며 살 수 있어 장보기가 편하다.
며칠 전, 동네에 있는 마켓엘 갔었다. 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장보기가 쾌적했다. 과일과 야채가 방금 밭에서 따온 것처럼 싱싱해 보였다. 생선 코너로 접어들 즈음 앳되고 낭랑한 음성으로 통화하고 있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매운탕 끓일 생선이 마땅치 않아요. 우럭이 없어요. 다른 것도 신통치 않고. 매운탕은 다음에 드시고 오늘 저녁은 낙지볶음이 어떨까요? 낙지는 많은데”
카트 위에는 두살 정도의 여아가 앉아 있고 그 옆에 남편인 듯 한 사람이 다정한 눈길을 아내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청순하고 깨끗해 보였다.
우연히 듣게 된 남의 전화 내용이었으나 참으로 마음이 찡-하게 저려왔다. 요즘 세대에 저런 며느리가 있다니. 우선 아버님이라는 소리가 그렇게 정겹게 들릴 수가 없었다. 생선이 없으면 그만이지 다른 것으로 대체해서라도 어른을 공경하려는 마음이 가상하다.
낙지를 고르는 여인 옆에서 나도 굴을 집어들면서, 마침 크고 좋아 보이는 낙지 팩이 있길래 얼른 여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여인은 낙지를 집어 카트에 넣으며 가벼운 목례를 했다. 그날 종일, 익숙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온 가족이 낙지 볶음을 놓고 단란한 저녁 한 때를 즐기고 있는 다복한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예전에 곧잘 쓰던 ‘단란한 저녁’이란 말이 사라지고 있다. 가족끼리도 서로 바빠 함께 자리하기 힘들다. 저녁이면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과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와 집안에서 가사를 돌보던 아내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식탁에서 웃음꽃을 피우던 일, 3대가 함께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던 일들이 이제는 ‘그 시절’의 이야기가 된지 이미 오래다.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내면에서 은은히 우러나오는 샘물 같은 정으로 인간의 근원적 목마름을 풀 수 있었던 가족간의 사랑, 그것이 그 가정의 향기이고 빛깔이었다.
어느 날인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블로그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올해로 일흔 여덟이 되신 시어머니가 종합 병원에서 눈꺼풀 주름제거 수술계획을 잡았다고 전하셨다. 시어머니의 내심은 늘어진 주름을 제거하고픈 욕심이 더 큰 듯하다. 기왕에 인심을 쓰기로 하였는바 지방과 주름을 말끔하게 제거해 달라고 의사 선생님께 요청했다.”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와의 관계처럼 감정의 교류를 느낄 수는 없겠으나 꽃다운 서른 한 살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힘겨운 세상을 살아온 시어머니에게 여자로서 느끼는 연민을 담담히 그렸다. 아픈 눈을 치료하며 덤으로 젊어지고 예뻐지리라는 기대에 부푼 시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팔순이 되어도 여자임은 분명하다는 며느리의 이해가 더 예뻤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석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며 마치 내가 받는 호사처럼 감격한 것은 이처럼 고운 마음의 며느리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며느리도 나이가 들어 시어머니를 여자로 봐 드리며 끈끈한 정으로 엮여진 관계가 도탑게 보였다.
“시부모는 없고 며느님만 계시다”는 말이 유행어로 나도는 요즈음 세상에서, 자신도 어느 날엔가는 남의 집 귀한 여식의 시어머니가 될 것까지 짚어가며 나이 드신 시어머니를 향한 배려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효심은 샘물 같은 것이어서 물의 근원이 마른 곳에선 결코 솟아나지 않는다.
시아버님의 저녁상을 걱정하고, 팔순 시어머니를 여자로 봐주는 며느리의 폭 넓은 이해가 미담으로 남아 있는 한, 좋은 고부간의 관계가 실낱같은 희망으로나마 존재 할 것이다.
유숙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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