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이나 감청은 동서고금 모든 사회 생존 메커니즘의 하나이다. 인류 최초의 낙원이라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브-뱀의 대화가 신의 안테나에 걸려 영원한 저주를 초래했다는 신화는 도·감청의 정체와 결과를 암시한다. 한국 도청사태에서 파헤쳐질 음란한 스토리들을 즐기려는 관음증에 나도 면역항체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이야기 거리보다는 한국 역대 정권 하에 은폐되어 자행된 ‘일하는 방식’ 즉 정치문화의 한 단면을 처결하고 쇄신할 계기가 될 가능성에 나는 관심을 둔다.
도청이냐 감청이냐는 차이가 그 행위를 어떤 규범 혹은 권위자가 인가했느냐 안 했느냐에 있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다.
홍석현 주미 대사의 커리어를 좌초시킨 원인 행위는 삼성의 시각엔 도청이지만 그 외 한국민의 이익을 보호하는데서 감청과 같은 결과를 갖는다. 삼성측에는 손실을 끼쳤지만 사회적으로는 도덕의 익사를 막고 정경언 유착문화를 척결할 이익의 계기를 열은 것이다. X파일들을 케이오스의 계곡 속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십자가로 받으면 한국 도덕이 부활의 언덕에 오르는 길이 트일 수 있다.
지금의 소란의 가장 큰 이유는 도청사건 폭발의 첫 충격보다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명제를 거부하며 이를 덮으려는 세력들이 파묻는 저항의 전초 지뢰밭을 한국민이 통과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X파일 폭로가 정계 개편 음모라고 의미와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유치한 저항은 도덕 자율신경이 마비된 소치이다. 진실 공개 여망이 음란한 것을 보고 즐기는 증상이라며 덮고 넘어가자는 관음증 정신분석가는 개인 수준의 도덕적 고결성을 내세워 사회에 끼친 해악을 은폐하자고 한다. 헌법을 지키려고 진실을 밝히기를 피해야 한다는 호헌론자들은 법률이 적은 악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큰 악의 처리를 회피하자고 한다.
기득권 유지에 우선 관심을 두는 정당 정치인들은 특검법-특별법의 제안으로 맞싸움을 하는 척하며 진실 밝히기를 회피하거나 부분적으로 마무리짓고 넘길 술수 찾기에 시간을 벌고 있다. 도피의 또 하나 복합형은 이번 사건에서 ‘책임’ 추궁을 빗겨서 도청방지법 강화를 주목표로 삼자는 주장이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청산을 선행시키지 않고 미래라는 시점으로 점핑하려는 도피 방편이 될 수 있다.
이런 도피의 기제는 사건들의 시리즈를 마늘통 같은 단순한 은유로 풀자는 오산에 기초한다. 마늘통에서 자기 쪽의 썩은 부분은 감추고 다른 쪽의 썩은 부분을 적출하면 자기측 피해를 최소화하고 나머지를 건질 수 있다는 손실회피 기제가 나온다. 그러나 이 총체적 부패사건 시리즈는 마늘이 아닌 양파의 은유로 파악해야 된다. 도청 문화에는 깊은 핵심층의 원천적 인물, 행위, 기구들이 있다. 홍석현 주미대사의 낙마는 양파의 표피층의 하나이며 그 발단인 문화방송의 이상호 기자는 양파의 겉껍질에 불과하다.
이 사건을 조사-처결한다는 사람들이 양파의 속층인 도청의 원천적 행위에 관련됐었다면 그들도 얼버무리는 도피 기제를 선호할 것이다. 도청사건 폭로 초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여론에 따라 처리한다며 침묵을 택한 것부터가 책임도피 부류의 숨통을 풀어준 신호탄이다. 여론이 공개 쪽으로 밀리자 노 대통령은 공개 방향을 천명하고 국정원은 김대중 정부 때에도 도청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뒤 이에 DJ가 입원하고 청와대가 호남 인심 눈치에 빌고 나서며 이에 DJ가 버티는 형국도 어설프다.
그나마 검찰과 국정원은 철로의 두 레일에서 바른 방향으로 구를 수밖에 없는 두 개의 바퀴로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고해성사를 하며 나서는 국정원은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에서 거대한 물고기가 잡어들에게 다 뜯기어도 뼈대와 가시만은 남았던 유형을 전시한다. 이는 청와대와 정당들이 문어처럼 다리들을 흐느적거리며 먹물 속에 숨으려는 것과 대조된다. 살을 뜯기어도 뼈대와 가시를 지탱하는 그 행위의 프로토 타입을 이번 사건의 원천적 행위자들과 처결자들이 모사할 수 있다면 한국은 도덕의 혼돈에서 헤어날 소망이 있다.
비리 행위자 모두를 척결한다는 목표 달성은 현실성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정치 문화, 행위 패턴을 차단하고 수정하는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안되면 ‘과거 청산’ 드라마가 노무현 정부에서 끝나지 않고 후속 정권들에서도 재현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X파일 시리즈는 한국 정치문화, 그 속의 정치적 행동 양태 치료에 좋은 약이 될 것이다.
이윤모
일리노이주 인권국
연구개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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