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끝났군.” ‘광복 60주년’이라고 했다. 그 이름으로 한국에서 연출된 이벤트, 그리고 쏟아진 말들을 접하면서 뱉어진 중얼거림이다.
서글프다. 그보다는 허전하다는 게 옳겠다. 혼돈스럽다. 그렇지만 치졸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또 그 이벤트가 노리는 게 너무 뻔해 보여서다.
광복의 날이고, 대한민국이 탄생한 날이다. 그런데 그 환갑잔치 날에 대한민국이 실종됐다. 주인공은 단연 북한 대표단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조연, 그리고 동원된 관객은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아서다.
그 날, 그러니까 2005년 8월15일. 대한민국은 아예 매장됐다. 민족이니, 통일이니, 깡마른 구호만 어지러운 가운데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면 부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광복 60년의 세월은 그렇게 부정되어야만 하는 건가.
“세대마다 주어진 역할이 있고 시대의 도전이란 게 있다. 그 도전을 극복하고 역할을 완수한 세대, 세대는 모두가 위대한 세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목할 세대가 있다.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다. 그들은 대공황을 극복했고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불굴의 의지, 희생정신, 근면, 그리고 확고한 가치관에 바탕을 둔 삶을 통해 세기의 도전을 극복하고 위대한 유산을 물려준 것이다.”
한 무명의 미국인이 부모세대에게 올린 찬사다. 그래도 양식이 숨을 쉬고, 또 가장 풍요로운 사회, 그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준 전 세대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이 세대들의 이야기를 모음집 형식으로 썼다. 이제는 은퇴한 톰 브로커가 7년 전엔가 선보인 ‘가장 위대한 세대’가 그것이다.
2차대전 종전 40주년 특집을 겨냥해 그 세대를 만나고 현장을 답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생이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부모세대, 그 세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준 고귀한 사랑, 희생정신, 그리고 따듯한 숨결을 새삼 발견해서다.
“정말이지 감동을 받았다. 그럴수록 진정으로 그들에게 감사하게 됐다. 내가 자라는 동안 그들은 내내 나를 돌봐왔다. 그런데 나는 감사를 할 줄 몰랐다.” 브로커 자신의 말이다.
‘당신들의 피와 땀, 봉사와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한 사회에서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전 세대에게 바치는 이 지극한 감사의 헌정사가 발표되자 갈채가 쏟아졌다.
극히 이기적이어서 ‘me-generation’으로 불린다. 월남전 세대다. 반(反)문화에, 반항의 세대다. 이 베이비 붐 세대가 중년의 나이를 지나면서 결국은 부모 세대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진정으로 감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 사회 스토리가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또 광복 60년의 세월이 그처럼 마냥 부정되어야 하는가.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다.
분단의 시대다. 고난의 시대다. 어찌 보면 비극의 시대였기도 하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표현대로 ‘미션 임파서블’을 이뤄낸 시대다. 온갖 어려움 속에 산업화에 성공했다. 그 물적 기반을 토대로 민주화에도 성공했다. 한 마디로 성공의 역사를 써 내려간 시대다.
이 시대의 주역은 이제는 뒤로 물러난 세대다. 40년대, 30년대, 20년대 출생 세대다. 그 맏형 격 세대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랐다. 이 점에서 가장 불우한 세대일 수도 있다.
이들은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란을 겪었고, 대한민국 건국을 지켜보았다. 6.25때는 피로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근대화와 산업화에 앞장서 민주화의 기틀을 다져 뒤이은 세대에 넘겼다.
물론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피와 땀과 헌신이 있었기에 성공의 대한민국 역사가 가능했다. 이 점에서 이들은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한 세대’로 불려도 되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생일날 이 세대는 오히려 분열과 갈등의 주역인 양 매도됐다. 이들이 피와 눈물과 목숨을 바쳐 지켜온 대한민국이 배제되면서 이들은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덕담과 감사의 말로 시작되어야 할 생일날에 비난과 자학에, 또 저주의 말만 쏟아진 셈이다.
그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온통 원망에 부정 일색이다. 이해라든지, 따듯함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뭔가 알지 못할 분노로만 차 있다. 그리고 과거에만 매달린다.
마치 자폐증의 언어 같다. 감사란 있을 수 없다. 과거의 상처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과거에만 집착하는 언어, 어둠 속에서 상처만 들쑤시는 언어는 사탄이 즐기는 언어다.
감사함으로 열려 있는 찬란한 미래로 나가는 언어를 구사하는 지도자가 보고 싶다. 언어는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옥 세 철
<논설위원>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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