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손순이라는 효자 이야기가 나온다. 손순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가장인데 끼니때마다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 어린 자식이 배가 고파 노모의 밥을 빼앗아 먹곤 하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손순은 아내와 의논을 했다 -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지요. 아이를 산에다 묻읍시다”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구덩이를 파는 데 땅 밑에서 석종이 나왔다. 기이하게 여긴 부부는 아이와 함께 종을 가지고 하산해 종을 쳤다. 은은한 종소리가 왕의 관심을 끌고, 종의 사연을 들은 왕은 부부에게 집 한채와 식량을 상으로 내렸다는 설화이다.
노부모 봉양을 위해 자식의 생명까지 내어놓는 지극한 효성을 찬양하면서 효도하면 부귀 영화가 뒤따른다는 효 지상주의의 교훈을 담고 있다.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이야기이니 21세기 우리의 삶에 접목시키기에는 뛰어넘어야 할 윤리적, 현실적 거리가 멀다. 천년의 세월만큼 아득한 그 거리를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 지난주 한국에서 있었다.
KBS-2TV의 한 드라마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방영돼 여론이 시끄러웠다. 드라마에서 시어머니는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를 위해 손자를 돌봐주는데 잠깐 한눈 판 사이 아이가 국그릇을 엎어 화상을 입는다. 병원으로 달려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어떻게 보셨느냐”며 뺨을 때리고, 기막혀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맞을 짓 하셨네요”라며 한술 더 뜬다.
시청자들은 문제의 장면 자체가 주는 충격과 함께 공영방송이 그런 ‘패륜’을 안방으로 내보낸 무신경함에 흥분했다. 신문과 TV뉴스를 통해 드라마 내용을 전해들은 이곳의 주부들도 분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이 정말 그 정도예요?” “요즘 못된 며느리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쳐요”…
한국의 신문들은 TV가 시청률 경쟁 때문에 자극적인 내용만 쫓는다며 국민의 건전한 윤리의식과 정서를 해치지 않도록 공영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엄중히 꾸짖었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노인들은 이 방송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별로 새로운 일도 아닌데 웬 소란인가”라는 반응은 아니었을지 겁이 난다.
인터넷에 글 올리며 분개한 젊은 세대들에게 ‘말도 안되는 비 현실’이 노인들에게는 이미 들어서 한바탕 분노하고 접은 실제사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슷한 사건을 전해들은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한국에서 방문한 친정엄마가 친구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며 전해줬다. “아이가 데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고, 아들이 ‘맞을 짓 하셨다’고 질책”하는 내용이 이번 드라마와 똑같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와 친구분들은 ‘너무 분해서 사지가 떨렸다’고 했다.
사회의 관심권 밖에서,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서, 노인들은 그들만의 분하고, 서글픈 사연들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뺨 때린 며느리’는 노인들에게 치가 떨리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성 없는 존재도 아니다. 노인들이 겪는 소외감과 애환은 그만큼 깊다.
1∼2년 전 우리신문 본지의 ‘장명수 칼럼’에 가족별 순위를 매긴 유머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어느 할아버지가 아들집에 다니러 가보니 집안의 실세가 ‘1번 손자, 2번 며느리, 3번 아들, 4번 강아지, 5번 가정부, 6번 할아버지’더라는 내용이었다.
그냥 유머라고 웃고 덮기에는 사금파리 같은 따끔한 진실이 있다. 우리가 노부모 생각하는 마음이 자녀들에게 쏟는 관심의 1/10도 못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정부 보조 덕분에 생활비 걱정 없는 미국의 노인들도 관심과 사랑에 허기지기는 마찬가지이다. 5남매를 키우고 LA 다운타운의 노인아파트에 혼자 사는 80대의 한 할머니도 말했다.
“어디 전화가 옵니까? 보고 싶으면 내가 아이들에게 전화하지요. 지금 세태가 그러니 어쩌겠어요”
그러고 보면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효(孝)의 기본이다. 명심보감은 말한다. “자식 대하는 마음으로 어버이를 대하면 그게 바로 효”라고.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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