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본보 주필)
참으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한국에서 터진 불법도청사건을 보면 그게 공산당이나 하던 짓이지, 어디 민주국가에서 더구나 문민정부를 자처하던 정권이 한 일이라고 생각 조차 할 수 있겠는가. 국가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관계, 재계, 언론계의 사람들을 불
법 도청했다니 정권을 가진 자들이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안간힘을 썼다는 말이다.
도청은 전화나 대화를 엿듣거나 전자장치를 이용해 녹음하는 것인데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는 사생활의 보호를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도청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국가기관에서 납치범 등 특별한 범죄 수사상 필요할 경우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도청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도 영장 발부 절차를 법률로 정하고 있다.
도청 파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1972년 닉슨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공화당원들이 민주당 선거대책본부가 있던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건물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관련자와 직속 상관이 고발되어 재판
을 받았는데 관련자 중 한 사람이 재판중 백악관과의 관련성을 폭로하면서 사건이 확대됐다.
그리하여 특별검사가 임명됐고 백악관 보좌관과 행정부 고위관리의 관련 사실이 드러났다. 닉슨대통령은 자신의 무관함을 입증하기 위해 백악관 테이프를 제출했는데 이 테이프에서 닉슨의 각종 비행 뿐 아니라 테이프 조작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그는 의회의 탄핵과 여론 압력에 직면,
1974년 임기중 사임하고 말았다.이번 불법 도청사건에서 더 기가 막힌 것은 도청 테이프와 도청 내용을 녹취한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을 통해 폭로된 내용이다. 한국 언론은 한국 최고 재벌의 비서실장이 여당 대선후보에게 거액의 돈을 전달하는 문제를 당시 신문사 사장과 의논했고 신문사 사장이 돈 심부름을 한 것으로 도청 내용을 보도했다. 그 사장이 또 검사들에게 돈을 주어 검찰을 관리했다는 내용과 여당후보 뿐 아니라 야당후보에게도 양다리를 걸쳤다는 내용도 보도됐다. 그 후 신문사 사장이
주미대사로 변신했고 유엔사무총장을 할려고 한다, 대권을 노린다는 말이 떠돌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노 정권에 무슨 다리를 걸쳤기에 그렇게 기세등등했는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YS 때 불법도청된 녹음 테이프가 2000개가 넘었다고 하는데 이번 파문을 일으킨 것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테이프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내용이 들어있을까 생각하니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보도에 따르면 DJ 정부가 들어선 후 일부 유출된 테이프를 회수했고
국정원이 폐기했다는 말도 있고 박지원씨도 알고 있었다고 하니 그 처리가 매우 궁금하다.
DJ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었다면 부랴부랴 없애버렸을 것이고 상대에게 불리한 것이 있었다면 잘 써먹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쨌든 불법 도청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불법 도청이라고 하더라도 위법이나 부도덕한 내용이 들어있다면 문제삼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불법 도청 문제가 터지자 불법 도청과 위법내용 보다도 테이프 유출과 보도에 수사가 집중되고 있는듯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만약 불법 도청 테이프의 유출 또는 보도가 큰 죄가 된다면 국가기관이 불법 도청을 하고 있는 사실을 뻔이 알더라도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으며 도청 내용에 국가를 전복시킬 만큼 엄청난 범죄행위가 있더라도 국민에게 알릴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정권은 맘놓고 불법도청을 하고 도
청 내용을 멋대로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는데 도청 사태로 보면 윗물이 썩을대로 썩어 있다.
마치 한강 상류가 썩어 식수를 오염시키고 하류의 생태계를 파괴하듯 집권자의 불법 도청, 지도층의 비리, 위법, 부도덕성은 국민 전체의 준법성과 도덕성을 망가뜨리고 있다. 지금 한국을 주름잡고 있는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재벌, 언론사 고위층 등의 얼굴을 하나 하나씩 떠올려 보라. 과연 얼마나 쓸만한 사람이 있는가. 한강을 오염시키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불법 도청의 내용을 공개하고 보도한 것이 실정법상 범죄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개와 보도를 통해 권력자와 고위층의 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본 서민의 마음은 시원하고 통쾌한 감이 없지 않다. 그 더럽고 추악한 가면을 벗겨서 심판대에 세울 수 있는 일이
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안기부 X파일이라는 YS정부의 도청 녹취록이 국민 앞에 공개되어야 한다. 또 DJ 때는 휴대폰의 도청 시비가 있었는데 그 진상도 밝혀져야 한다. 지금 노 정권이라고 해서 도청이 없다고 믿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만약 현정권이 불법 도청을 한다면 그것도 다음 정권 때는 공개되어 불법 도청 사실과 위법내용이 단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불법 도청은 사라지고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과 국민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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