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문의 ‘맛있는’ 칼럼 ‘주방일기’를 맡고 있는 정숙희 기자가 이번 주에는 남편과 아들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 이야기를 썼다. 두 남자가 마사지, 설거지 등 갖가지 ‘서비스’ 품목들을 담은 쿠폰 북을 선물했는데 그중 마음에 드는 선물은 ‘졸고 있을 때 가만 놔두기’라고 했다.
돈도 수고도 들지 않는 그 선물이 얼마나 큰 ‘배려’인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주부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하루종일 일과 사람에 시달리다가 가족들이 잠들고 난 한밤중에야 겨우 혼자만의 시공간을 얻어내는데, 지친 몸으로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멍하니 앉아 있다 꾸벅꾸벅 조는 일. 하지만 그 마저도 ‘자유’ 같고 ‘해방’ 같아서 대단한 호사나 누리듯 밤 공기 섞인 서늘한 고독을 아껴 즐기는 것인데, 내게 그런 강한 갈증이 있었던 사실을 나는 어느새 잊고 있었다. 1년 차 ‘빈 둥지’ 주부의 망각이다.
똑같이 직장 갖고 자녀를 키워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 갈구가 강하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아닌 올올이 나 자신이 되는 시간. 하루 중에 이런 시간을 밀어 넣을 틈이 남성에 비해 여성은 적기 때문이다.
직장 가진 엄마들의 하루는 시간과의 전쟁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 마치고, 아이들 깨워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학교 데려다 주고, 허둥지둥 출근해 직장일 마치고 나면, 5분도 지체없이 집으로 달려가야 저녁식사 준비해 가족들 먹이고, 설거지하고, 아이들 숙제 봐주고, 다음 날 먹을 것 챙기는 빡빡한 일과를 소화해 낼 수가 있다. 잠은 늘 모자라고 몸은 늘 고단하다.
거기에 아이가 아프다든지, 자동차가 고장난다든지, 직장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는 등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여들면 하루 24시간에 하루 분의 일과를 비벼 넣는 일 자체가 곡예이다. ‘나’를 돌아보며 심신을 다독이고 재충전할 필요성은 알지만 현실에서 그 시간을 얻어내기는 힘들다. 그러니 제발 ‘졸고 있을 때 가만 놔두’는 것이 주부들에게는 선물이다.
세 아이를 키운, 그래서 보통 엄마들 보다 좀 더 바빴던 나 역시 ‘혼자…’는 가장 누리고 싶은 사치였다. 지난 10여 년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던 시간은 출퇴근길 운전할 때뿐이어서 그 시간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토요일 아침 아이들을 주말 프로그램에 데려다 놓고 혼자 커피샵에라도 가서 앉아 있으면 그만한 호사가 없었다.
시간에도 ‘희귀성의 가치’가 적용되는 걸까. 이제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빈 둥지’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넘치는데 그 시간의 맛은 예전과 다르다. 한여름 땡볕에서 땀흘려 일하는 농부에게 휘- 불어드는 한줄기 바람 같던 그 시간이 이제는 추수 끝난 가을 벌판을 메우는 황량한 바람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 가정의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가정도 생명이 있다. 계절이 있고 수명이 있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면서 가정은 태어나고, 새싹이 돋아나듯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봄을 맞으며, 진초록으로 쑥쑥 풀과 나무가 자라듯 아이들이 성장기를 통과하는 여름이 있다. 자녀들을 성인으로 키워 내보내는 추수의 계절을 맞으며 가을이 되고, 부부가 노쇠하면서 긴 정적이 이어지는 겨울이 온다. 그 겨울에 부부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가정도 수명을 다 한다.
이슬람 신비주의 계열로 수피즘 철학이 있다고 한다. 수피즘에는 특이한 수련법이 있는데 그냥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이 행복을 얻는 방법이라는 가르침이다. 특별한 행동도, 말도 필요가 없다고 하니 호감을 타고 기나 에너지 같은 것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이 된다는 이론인가 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 그런 효과인 것 같다.
아이들 키우느라 한창 바쁜 ‘여름’의 주부들이 고된 일과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은 ‘함께 있음’의 덕분이 아닐까. 가족들과 부대끼며 사는 동안 충전되듯 얻어지는 에너지이다.
‘혼자만의 시간’은 주부들에게 필요하지만 너무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여름에는 여름을, 가을에는 가을을 즐기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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