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전문가 김행오씨
미군통역관·영화제작자·언론사 사장등 지내며
50여년 와인 사랑 유럽 생산지 두차례 순회
와인 불모지 한국서 독보적 전문가로 명성
LA‘윌셔 와인클럽’서 10년간 와인 지도
요즘 한국의 드라마를 보면 식당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와인이 유행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전만 해도 한국인에게 와인은 매우 낯선 술이었다. 지금도 많이 마시고는 있지만 그다지 빨리 친숙해질 수 없는 것이, 와인은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없으면 아무리 마셔도 그 진정한 맛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모레 팔순을 바라보는 김행오(78)씨가 아주 오랫동안 한국의 독보적인 와인 전문가로 대우받아온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와인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50년 이상 매일 와인을 마셔온 그는 평생 미군통역관, 영화제작자, TV편성국장, 신문사 사장 등의 숱한 직함을 가져왔지만 그 모든 경력이 ‘와인 전문가’라는 호칭 앞에 맥을 추지 못한다.
그 자신도 오랜 세월동안 일궈낸 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지난 10년간 LA의 ‘윌셔 와인 클럽’에서 한인들에게 와인을 가르쳐온 것이 가장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다고 술회하곤 한다.
김행오씨가 처음 와인을 접하게 된 것은 미군부대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22세때. 서울공대 화공과 출신으로 영어를 상당히 잘했던 그는 군사재판의 통역을 도맡았는데 부대에서 식사하면서 마셔본 와인의 향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평소 술을 못 마시는데 와인은 너무 강하지 않고 섬세한 맛 때문에 끌리기 시작했지요. 당시 PX에는 유럽산 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물론이고 미군들도 와인을 잘 모르니까 잘 팔리지 않아서 손쉽게 여러 와인을 마셔볼 수 있었죠. 갈수록 심취하면서 와인 책을 많이 구해다 읽으면서 공부했습니다”
부산에서 피난살이하던 시절에도 판잣집에 와인저장고를 들여놓고 매일 와인을 마셨다니, 와인이 뭔지 아는 사람도 없던 전후 한국에서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었던, 순수한 와인 사랑이었다.
유엔 관계 일을 하면서 유럽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김씨는 남들 찾아다니는 관광지를 마다하고 언제나 와인 생산지역들만 찾아다녔다. 덕분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최대 와인생산국들을 두 번씩이나 돌아보면서 와인에 대해 더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갖게 됐다.
“와인 전문가들이 최고라고 말하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을 방문해보면 보르도 강변의 기후와 토양이 카버네 소비뇽과 멀로 등 적포도주 재배에는 최고의 테루아를 갖고 있음을 직접 보게 됩니다. 세계 최고라는 로마네 콩티도 실제 가보면 포도밭이 자그마해요. 그 작은 면적의 땅에서 특별한 포도가 재배되어 나오는 것이죠”
와인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그는 오랫동안 독보적인 와인 전문가로 대접받았다. 덕분에 고급 와인을 즐기는 ‘특수 계층’의 인사들과 교제할 기회도 많았고, 와인에 관해서는 늘 자문역할을 도맡았다.
그러나 와인이 직업이 될 수는 없던 시절, 사진과 영화에 조예가 깊었던 김씨는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기록영화 제작에 정열을 쏟았다.
당시 기록영화라야 국가선전용이 주를 이뤘지만 그는 낙동강의 삶과 자연을 담은 독특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해 일찌감치 한국 영화예술계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을 인정받았다.
60년대 말 TBC 동양방송이 설립되면서 초대 편성국장으로 일했고, 70년대초 미국내 동양방송 지사 설립을 위해 LA로 이주했다. 74년 창간된 미주중앙일보의 초대사장을 지낸 그는 80년대 방송 통폐합으로 동양방송이 없어지자 귀국해 호텔운영을 맡아달라는 삼성의 요청을 고사하고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에 남았다.
이후 한국전쟁에 관한 미 TV시리즈 MASH에도 자문을 제공하는 등 남가주 방송언론계에서도 많은 기여를 해온 그는 은퇴후 현대화랑의 김학용 관장과 와인 클럽을 만들어 매달 한번씩 와인 강의와 시음을 해왔다. 와인클럽에서 그동안 고루 마셔본 와인이 2,000가지 이상 된다는 김씨는 “와인 클럽이 없었다면 와인 사랑과 와인 지식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말았을텐데 많은 사람들과 나누게돼 정말 좋았다”고 말한다.
“와인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음료”라고 예찬한 김씨는 요즘 한국에서 일고 있는 와인 붐에 대해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된 것은 좋으나 유행이라고 무조건 마시거나 많이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지적하고 즐거운 삶과 건강을 위해 식사 때 한두잔 곁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와인 전문가 김행오씨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보르도산 무통 로실드를 소개하고 있다. 김씨는 매년 유명화가들이 그리는 무통 로실드의 레이블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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