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폰 북
우리 집에선 요즘 쿠폰 북이 유행이다. 지난 번 아버지날에 아들이 아빠에게 선물로 만들어준 쿠폰 북이 약간의 히트를 치자 이번 나의 생일에도 쿠폰 북이 등장한 것이다.
지난 일요일, 당번이어서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오니 식탁 위에 장미꽃과 초컬릿, 촛불을 밝혀놓고 부자간에 경쟁하듯 만든 쿠폰을 내놓았다.
아들은 지난 번 아버지날 선물보다 훨씬 성의 있는 쿠폰 북을 만들어 나에게 선물했다. 종류도 11가지나 되고 쿠폰에 그림도 그리고 색도 썼다. 그걸 만드느라 종일 끙끙댔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엄마 샤핑 따라가기(5회 사용) ▲풀 바디 마사지(4회) ▲배큠 청소(3회) ▲설거지(5회) ▲빨래(6회) ▲스트레잇 A 성적표 받아오기(단 1회) ▲엄마에게 아침식사 만들어주기(2회) ▲엄마의 디너 쿠킹 쉬게 하기(3회) ▲연속 10회 뽀뽀(7회) ▲엄마와 한국 드라마 보기(3회) ▲클라리넷으로 엄마 원하는 노래 연주하기(4회)
남편은 따로 쿠폰 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특별 인쇄한 종이에 25가지 항목의 VIP 초대권을 발매했다. 너무 사적이거나 닭살 돋는 내용을 제외하고 내 맘에 든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밥 안하기(너무 자주 사용 엄금)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빨래하기 ▲청소하기 ▲보너스 나오면 다 주기 ▲혼자 있을 시간 만들어주기(원겸이 데리고 나가기) ▲가끔씩 도시락 안 싸기 ▲졸고 있을 때 가만히 놔두기 ▲일요일 아침 교회 갈 준비 빨리 하기 ▲샤핑 함께 가서 어울리는지 봐주기 ▲평생 무료 마사지
나는 누군가 나 대신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 해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그걸 모르는 아들은 쿠폰에 설거지와 빨래를 포함시켰고 그걸 아는 남편은 빨래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주겠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 여러 가지의 쿠폰 중에서 가장 내 맘에 든 것은 ‘보너스 나오면 다 주기’와 ‘혼자 있을 시간 만들어주기’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졸고 있을 때 가만히 놔두기’이다. 졸고 있을 때 놔두기는 혼자 있을 시간 만들어주기와 일맥상통하는 서비스로서 그 배경은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찬가지이겠으나 나는 평생토록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한국서는 수많은 가족과 복닥거리며 살았고, 미국에 와서는 결혼 전까지 언니 집에서 살았으며,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래서 때로는 혼자 사는 싱글들을 볼 때면 자기 맘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로운 그들의 삶이 너무나 부러워 한숨을 쉬곤 한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하루 일이 모두 끝난 오밤중이다. 아들은 들어가 잠을 자고, 남편도 컴퓨터에 들러붙어 집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면 나는 와인 한 잔을 들고 불꺼진 거실 소파에 파묻혀 그냥 멍하니 앉아 있곤 한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쉴새 없이 왔다갔다 하다보면 몸도 좀 쉬어야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정신과 영혼이 쉬고 싶어 아우성을 치는걸 느끼기 때문이다. 그럴 때 전에는 밀린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서 릴랙스 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그냥 ‘멍’하고 앉아 있는걸 가장 좋아한다.
문제는 멍하게 머리를 비우다보면 스르르 잠에 빠져버리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새벽까지 소파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자는 일이 거의 매일이고, 때로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놓쳐 카펫에 쏟아버리는 일도 가끔씩 일어난다는 것이다.
남편이 질색을 하는 것은 당연하여서 내가 졸기 시작하는 것만 보면 들어가라고 야단을 치는데, 혼자 있는 시간을 빼앗기기 싫은 나로서는 잡아끌면 끌수록 단단히 버티기 때문에 한밤중에 끌고 당기는 희한한 부부싸움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졸고 있을 때 가만히 놔두기’는 그 어떤 쿠폰보다 나에게 중요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가족끼리 쿠폰 북을 만들어 선물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쿠폰이라는 것이 원래 그걸 받는 사람에게 금전적 혜택이나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 아닌가.
나의 아내가, 남편이, 딸이, 아들이 좋아할 쿠폰을 만들다보면 그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고, 또한 나는 싫지만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위해 몇번쯤 희생하겠다는 각오도 보여주게 되므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데 얼마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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