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렬(교육가)
큰 어른이 계셨다. 참 스승이 계셨다는 느낌을 받았다. 뜻밖에 한글학회에서 눈뫼 허 웅 선생 추모 문집을 보내왔다. 그 책을 읽은 느낌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학교가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문집을 펴낼 때 꼭 선생의 축사가 받고 싶었다. 그래서 만나뵌 일도 없는 분한테 부탁을
했고, 소원을 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교롭게도 건강이 좋지 않으신 무렵이었다. 얼마나 무례한 일이었나.
그 책이 떠나신 분을 그리워하는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주로 제자들의 작은 논문집 같은 성격이어서 읽는 동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의 인품과 학설에 머리 숙이며, 생전에 만나뵙지 못하였음이 애석할 뿐이다. 이렇듯 올곧은 학자가 계셨기 때문에 한국말과 한글이 바르게
자리를 잡으며 세련되어 가고 있음에 감사한다.
눈뫼는 한글을 전용하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에 따르면 ‘과학 발전을 위해서는 수학을 배워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동양의 전통 사상을 깊이 알고 특히 윤리 도덕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는 한문도 잘 배워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영어 배우는 시간 만큼 한문도 배워야 한다. 특히 대
학에서는…’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민족의 혼이 담겨 있는 한국말을 한글로 적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현재 미디어에 나타나고 있는 문자언어 현실을 보면 눈뫼의 학설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한글 표현으로 미흡한 점이 있는가. 이는 한글과 한자 혼용 주
장도 물리쳤다. 사회는 누군가가 방향을 지시하고 이에 동의만 하면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어서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영어는 왜 세계로 퍼지고 있는가. ‘영어가 오늘날 국제어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단순히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영국과 미국이 정치·군사·경제의 대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미 오래 전에 에스페르센과 같은 언어학·영어학의 대가가 있어서 영어의 연
구와 보급에 노력하고, 그 뒤에 많은 학자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줄기차게 노력한 결과이다’라고 지적한 김차균 교수의 지적에 동의한다. 이런 뜻에서 우리 말과 글을 갈고 닦기와 한글 전용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눈뫼의 공로는 오래 남을 것이다.
눈뫼는 한말글이름·아름다운 가게이름 선정 행사 등 일상 생활에서 한국말과 한글이 사랑을 받는 분위기 조성의 원동력이었다. 처음에는 낯설던 말과 글이 차츰 차츰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요즈음 미국에서도 예쁜 한국 이름·가게 이름이 늘어나고 있음
은 좋은 현상이다.
‘놀라운 논문을 쓰려고 하지 마세요. 나중에 놀라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지요’ 눈뫼가
이런 뜻의 말을 하였음은 퍽 재미있다. 말 수가 적은 그가 유머감각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평
상시 낮은 목소리로 강의를 하여서 졸기에 안성맞춤이라며 학생들이 ‘허최면’이란 별명을 붙
였다지만, 그 강의 한 번 못 들어본 것도 유감이다.
‘우리가 오천 년을 살아오면서 과연 우리 말과 우리 글을 가지고 교육을 한 것이 몇 년이나 되느냐? 교육은 나라 발전의 근본인데 그 근본인 교육을 우리는 남의 글과 사상만 죽자고 배웠다’고 눈뫼는 뼈아픈 말을 하였다. 또 ‘근래 우리들에게 부닥친 문제가 둘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세계화의 물결이고, 하나는 민족 자주 정신 수호를 위한 투쟁인데 이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헤쳐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눈뫼는 한국어학자·언어학자 그리고 교육자였다. 그는 ‘한글나무’를 키우는 정원사였다. 눈뫼는 될성부른 나무들을 선택하여서 보이게 안보이게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현재 한국내 각 대학에서 국어학 교수직을 맡고 있는 제자들이 많다. 이것은 눈뫼의 생명이 연장됨을 말한다.
그는 오래 오래 한국어 연구의 바탕을 이룰 것이다.
이 책에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한글날’이 경제원리 때문에 공휴일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국보 제 1호격인 ‘한글’에 대한 긍지가 있다면 당연히 국경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눈뫼가 이루지 못한 일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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