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허풍쟁이”라던 칭호를 미스터 김정일로 바꾸자 “도덕적 미숙아”도 “각하”로 바뀌었다. 불과 한달반 사이에 워싱턴과 평양의 최고 지도자 간의 수사(修辭)들의 에너지와 방향이 돌변했다.
나는 북한 전문가는 아니므로 단지 수사어들의 급변에서 흥미를 느끼며 분석을 해본다. 북한의 이런 재빠른 수사적 반응은 협상에서 북한이 민감하게 상응행위를 할 능력과 용의를 지녔음을 전시한다. 자기측 입장을 고수하고 상대의 양보만을 요구하며 게임 이론 밖 벼랑 끝에 서 있던 북한이 달라졌다는 밀도 높은 신호이지만 북한은 무시로 말을 바꾸는 예측 불허한 패턴의 사회이다.
특히 “북한 체제를 인정하면 미국을 우방으로 대할 것”이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스테이트먼트는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할 정도의 비약이다. 북한은 “원쑤의 미제놈들”을 “우방”으로 띄우기 전에 거쳐야 할 몇단계의 멘탈 스페이스를 도약하려 한다.
통상 개인이나 사회 집단간의 관계에서 적대적 태도가 끝난다고 해서 곧바로 친구로 되지는 않는다. 피차간 무관심해지는 상태가 있고 관심을 갖고도 중립 관계를 갖거나 전혀 관계를 갖지 않을수도 있다. 북한이 “적대 관계의 종식” 같은 중간 단계를 건너 뛰어 “우방”이라는 메탈 스페이스에 투사를 한 매핑의 도약은 미국의 우방이라는 표적 스페이스에 북한이 도달하기를 얼마나 갈망하는가를 표출한다.
북한이 “우방” 가능성이라는 자기 유혹감을 고백한 태도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 특사를 통해 전해진 미국의 당근 메뉴가 갑자기 더 불어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워싱턴의 수사들이 유화적으로 변했다는 인센티브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협상 파트너트측의 여건 변화 보다는 북한 자체내에서 상황 인지(認知)가 달라졌다고 나는 추리해 본다. 즉 핵 보유 전시의 유용성은 절벽 끝에 이르고 그 것이 오히려 저해물(disincentive)이라는 계산에 북한이 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달전까지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공공연히 자랑하고 핵실험을 훼인트하면 국제적 위상 승격과 흥정 베팅의 증대가 따른다는 방정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정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고 핵무기를 가진 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하되 북한이 핵무기 판매를 시도할때는 공격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했다.
북한의 핵무기는 삶아 먹을수도, 써 먹을 수도, 팔아 먹을수도 없는 고민의 하드웨어라는데 저들의 매핑이 도달했을 것이다. 한반도를 비핵화 해야 된다는 김일성 수령의 유훈이 이런 멘탈 매핑의 전환점에 등장하는 것이 그 단서이다. 그리고 10여년간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동안 가려져 있던 김일성 수령의 유훈이 지금 와서 북한의 입장 전환 가능성을 전시하는데 구실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의 역전은 역시 북한다운 것이다.
북한이 핵 연료봉과 미사일 유희로써 기대한 효과를 주 상대국인 미국으로부터는 얻지 못하고 효용의 정지점에 달한 반면 국내의 빈곤 압력과 국제적 제재 위험도는 계속 증대하고 있다. 체재 와해를 피하면서 변화해야 되는 고민 상태에서 북한은 핵 연료봉의 유희보다도 수사(언어)들의 유희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평양과 워싱턴이 유연한 수사의 유희를 시작했으니 이 양태가 피차간 이득이 되는 협상으로 진전하려면 상호간에 상응행위 능력과 의도를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워싱턴의 네오콘들은 말을 아끼고 “미스터” 식의 톤을 유지하여 북한의 구실과 체면을 유실시키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에 워싱턴의 어느 누가 실언을 하더라도 북한은 중고 구제품을 거절하는 자긍심의 기제로 윗수의 수사적 유희를 유지하면 관계 진전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수사의 유희에서 걸리는 것이 “주체”라는 단어이다. 북한 인민을 단합-동원시키는데 사회심리적으로 유효하고 국가 운영 지향성까지 설정할 수 있는 “주체”는 경제 발전에 필요한 절차적 정보들이 결여되고 글로벌 시대 참여를 막는 것이다.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에서 “민족끼리”를 강조하고 “주체”라는 단어를 삽입하는 것은 이중적 가치관의 사용이다. 북한이 절박하게 원하는 미국과 “우방” 관계는 주체사상 밖에 있다. “민족끼리”라는 말은 6.25를 모르는 남한의 세대를 회유하는 단어이다. 북한측에 다행스럽게도 남한에는 이 말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지도층과 여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남한의 부총리급 장관 겸 대통령 특사가 평양 시내에서 조깅 15분만에 김정일 위원장 면담 통보를 받고 급히 달려갔다는 의전절차를 감지덕지 받아들인다. 한국 언론은 이 프로토콜을 마치 몇 년 만에 한번 보는 개기일식처럼 호들갑스럽게 특필했다.
남한은 북한에 퍼 주면서 끌려갈 만큼 관대하든가 어리숙하다. 그래서 북한이 남한을 관리하는데는 주체와 민족끼리라는 수사어들이 계속 유효하다. 북한이 남한의 햇볕정책 만큼 관대하고 어리숙하게 이미지 관리를 한다면 워싱턴과 평양 사이의 수사들의 댄스는 새로운 시빌리티(civility)의 수준에서 진전될 것이다.
이윤모
일리노이주 인권국
연구 개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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