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이면 가끔 포도주를 한잔 앞에 놓고 남편과 둘이 마주 앉는다. 방해받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주로 달콤한 로맨스나 가벼운 코미디 영화를 보곤 한다. 부분 조명과 스테레오로 흐르는 배경 음악과 장면들은 곧잘 우리들을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게 하는 감정이입의 상태를 가져와 가끔 황홀경이거나 충분한 카타르시스를 느껴 한 주일의 우울과 스트레스, 피로를 덜어내기에 충분하다.
‘호텔 르완다’ DVD를 구입한 것은 막연히 2004년 아카데미상과 2005년 골든 글로브상에 추천된 영화라는 것 때문이었고 르완다의 인종문제를 다룬 영화인 것은 미처 알지 못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의 식민주의에서 벗어나 민족자결주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되어진 종족간의 분쟁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집단학살의 대상이 되어야했다.
영화는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을 배경으로 투치족 1,268명을 자신의 호텔로 피신시켜 목숨을 구한 호텔 지배인 루세사바지나의 실화를 가족 중심의 이야기로 펼쳐 보이고 있다. 광기의 후투족은 연일 바퀴벌레 같은 투치족은 박멸해야 한다고 라디오 방송을 하고 이성을 잃고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살인광란을 벌린다. 가축을 도살하듯, 3개월 동안 최소한 80만명 이상이 학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고 보면 하루 1만명 이상이 무차별 살해당했다.
누가 이 광기의 집단학살에 책임을 질 것인가. 자신은 후투족이면서 투치족 부인을 둔 주인공인 호텔 지배인인 주인공은 두 종족 모두를 이해하고 사랑했기에 사력을 다해 가족과 이웃을 피신시키고 후투족을 설득하고 인맥과 뇌물을 써가며 투치족을 구하려 했지만 혼자서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중립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쓰지 않는다는 유엔 평화군은 종이군대였고 중국은 한 개에 10센트밖에 안 하는 값싼 도살용 칼을 대량 수출하였으며 프랑스는 용병을 보내 후투족의 후광이 되어 르완다에 있던 유럽인들과 자국민들의 보호 이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르완다를 식민 화하고 있었던 벨기에는 이미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안개 자욱한 거리, 자신의 호텔에 피신한 사람들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후투족 상인에게 다녀오던 주인공의 차는 돌무덤, 웅덩이 같은 것에 거세게 흔들리며 뒤뚱거린다. 문을 열고 내려보니 그는 시체의 물결 위를 건너고 있다. 이어지는 시체와 시체더미 속에서 울부짖는 주인공.
20세기 최악의 인종 학살의 하나이었던 르완다 사태는 그 해 7월 투치족 반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학살의 원흉이었던 군부와 동조 세력들은 국외로 탈출하였고 1998년 클린턴 행정부는 인종학살을 방관한 무책임을 인정했다. 또한 2000년 벨기에 정부도 르완다 희생자들의 추모식에서 식민통치와 인종학살 외면에 대해 정식 사과하였고 유엔도 참사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자성의 소리를 높였다.
영화는 르완다의 두 종족이 왜 서로 죽여야 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가족을 사랑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의 인간적인 면과 대학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치는 과정을 우리들에게, 세계인들에게, 차분히 펼쳐 보인다. 이 비극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속의 어느 곳에서 계속하여 일어나며 무고한 희생을 강요한다.
영화의 끝에 자막으로 처리된 호텔 지배인의 근황, 그는 지금 르완다를 탈출해 부인과 자녀 셋, 처남 부부의 두 딸을 입양해 평화스러운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했다. 투치족이었던 처남 부부의 소식은 알 길이 없고 아직도 그들을 기다린단다.
아프리카란 원주민 말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이란다. 신비롭고 낭만적이며 풍부한 자원의 땅에서 이제는 피 냄새가 걷혀지기를 기도한다. ‘르완다, 르완다…’ 손 드럼을 치며 커다란 소리로 부르는 아프리카 풍의 영화음악이 가슴을 두드린다. 6.25에서 광주항쟁으로 이어졌던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는 영화의 장면들과 함께 삶의 숙제가 되어 엉켜지며 더 많은 물음을 던져준다.
영화 시작 전에 따라 두었던 포도주는 아직 반잔이나 남았다.
전지은 간호사 국제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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