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빌 게이츠는 세계 제일의 자선가이기도 하다. 그와 그의 아내 멜린다가 2000년 세운 ‘빌과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재단 기금이 288억 달러에 이른다. 사람들 귀에 훨씬 더 익은 록펠러 재단이 30억 달러 정도니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게이츠 부부는 이 돈을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아동의 건강 증진과 교육에 쓰고 있다.
자선에 관대한 것은 게이츠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의 오랜 전통이다. ‘건국의 아버지’로 자수성가한 인물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업에 성공, 40대에 은퇴한 후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세우고 철학협회를 만들었으며 장차 펜실베니아 대학의 모체가 된 학교를 설립했다. 그 후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돈을 벌면 이를 사회적으로 유익한 데 쓰는 것이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최근 들어 미국 내 한인 사회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LA 한인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하나인 홍명기씨는 수 년 전부터 ‘밝은 미래 재단’을 설립, 한인 사회의 각종 봉사 단체와 학술 활동을 지원해 오고 있다. 현재까지 이 재단에서 각종 사업 기금으로 나간 돈만 500만 달러가 넘는다. 이 재단에서는 이와는 별도로 경제 연구소를 설립, 한인 경제 발전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할 계획이다.
한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기금 규모가 수백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가 넘는 각종 공익 재단이 지난 수년 간 여러 개 생겼다. 한 의료계 종사자가 세운 재단은 1,000만 달러를 기금으로 조성해 놓고 조용히 선교 사업을 지원 중이다. 또 다른 한인 금융계 인사가 추진해 온 500만 달러 규모의 자선 재단도 마무리 단계에 있다. 올 가을 설립 작업이 끝나면 한인은 물론 흑인, 라티노를 가리지 않고 노약자와 극빈자를 상대로 구호 사업을 벌일 예정이며 매년 재단 규모를 늘려 장차 대형 단체로 만들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이들 한인 재단 창립자들의 공통점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한인 사회에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것을 꺼리고 재단을 운영한다는 사실조차 알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번 한인 사회에 발을 디뎠다가는 돈은 돈대로 들면서 욕은 욕대로 먹는다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돈을 달라고 해 주면 고맙다는 소리보다는 “왜 요것밖에 안 주느냐”는 이야기를 듣기가 십상이다. 어쩌다 거절이라도 하는 날에는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준다”느니 “돈만 아는 수전노”라느니 벼라별 험담을 다 듣기 마련이다. 한 두 번 이런 일을 경험하다 보면 한인 사회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시아 소사이어티가 선정한 ‘2005 올해의 인물’로 뽑힌 이종문(77) 암벡스 벤처그룹 회장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화제다. 이 회장은 지난 31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창업주가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문제가 많다”면서 노부부가 살 돈을 제외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뜻을 비쳤다. 종근당을 창업한 고 이종근 회장의 친동생인 이 회장은 1970년 도미, 50대에 1982년 다이아몬드 컴퓨터시스템을 설립해 실리콘밸리 성공신화를 일궈낸 인물이다. 그는 전에도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에 1,5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자선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을 가장 잘 이해한 책”이란 평을 받고 있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의 강점으로 자발적으로 개인들이 설립한 단체의 번성을 들었다. 이들이 고립된 개인과 거대한 국가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며 사회가 원만히 기능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중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공익 목적으로 설립된 자선 단체이다. 카네기와 록펠러는 한 때 미국 제일의 부를 호령했지만 지금 부자로서의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세웠던 스탠더드 오일과 카네기 강철회사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름을 딴 학술 문예 재단은 지금도 남아 미국 사회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어찌 됐든 큰 규모의 한인 재단이 속속 들어서는 것은 한인 사회도 경제적 성장에 못지 않게 정신적으로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인들이 ‘탈세나 일삼는 부정직한 민족’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버는 만큼 베푸는 민족’으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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