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한 때는 그렇지만 무소불위(無所不爲)라고 할까, 그 정도로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이것 없이 대권주자가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워싱턴 블레싱’(Washington’s Blessing)이다.
그 은총을 입기 위해 저마다 여간 애쓴 게 아니었다. 대권 지망형 정치인 사무실을 가본다고 하자. 미국의 거물 정치인과 찍은 사진이 반드시 걸려있게 마련이었다.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한국의 정치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은근한 과시로.
그 잔재 때문인가.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사진 찍기에 바쁘다. 명색이 의원 외교단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보는지는 도통 관심이 없다. 오직 관심은 미국의 거물정치인과 사진 찍기다.
그렇다고 달라진 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결여됐다. 이게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다. 미국에서는 그저 판에 박은 듯한 발언만 한다. 그 말이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왕왕 달라진다.
왜 달라지나. 국내여론 때문이다. 그걸 의식하다 보니까 튀는 발언이 가끔 나온다. 미국에 한 수 지도했다는 식이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뭔가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서다.
‘김정일 위원장을 알현하지 못한 사람은 대권의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요즘 한국 정치계의 분위기다. 이 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저마다 평양을 못 가 안달이다. 여당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야당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불감청이나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라고 했나. 경위야 어찌됐든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찍은 사진이 신문에라도 게재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는 심사다. 정치적으로 ‘확 뜬다’는 계산에서다.
평양서 열리는 6.15 통일대축전 행사문제도 그렇다. 그 참가 합의가 이루어진 남북회담이라는 게 애당초 ‘비료 20만톤을 줄 테니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방북을 수락해 달라’는 식의 회담이었다. 그러니 대권경쟁과 관련해 기필코 평양을 방문해야겠다는 정 장관의 염원이 이루어진 셈.
이런 경로를 거쳐 정부측 대표 70명을 포함해 685명의 남측 대표단이 축전에 참가키로 합의된 것이다. 그러자 한다 하는 정치인이면 저마다 평양에 가겠노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거다. 북한측은 그런데 며칠 못 가 남측 대표단 규모를 220명으로 축소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한국정부만 머쓱해진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김정일 블레싱’이 한국정치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면서 ‘워싱턴 블레싱’을 압도하고 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 같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한국외교의 총체적 위기다. 초점은 오직 국내 정치다. 그러므로 시도, 때도 없다. 국내든, 해외든 장소도 관계없다. 오직 국내용 발언뿐이다. 그 유명한 노무현 대통령의 LA 발언도 그렇다.
한국의 군 통수권자가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십분 이해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 무엇을 노린 발언이었나 한국의 국내 여론이다. ‘김정일 블레싱’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한국 국내용 정치 발언이 아니었을까.
외교와 동맹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안보문제까지 국내 정치화한다. 그 발언이라는 게 그리고 아주 자극적이고 대중 영합적이다. 일시나마 환호가 따른다. 축구장을 메웠던 ‘붉은 악마’의 함성 같이 말이다. 그 함성 속에 외교가 망가진다. 동맹이 흔들린다. 안보가 위협받는다.
동맹국의 불신을 스스로 불러들여서다. “한국과 미국은 결별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에서 공공연히 나오는 이야기다. 그래도 발언은 계속된다. 동북아 균형자론이다. 중국과의 군사관계 강화론이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 미국은 계속 경고시그널을 보내고 있는데도….
보다못해 비공개 간담회에서 한 우방 국가의 외교관이 귀띔 해준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벌컥 화를 냈다. 그리고 외교 전례를 무시하고 떠벌린다. 미국, 일본과의 동맹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6월은 한국외교에 중대한 달이다. 10일 한미정상회담에 이어, 한일정상회담이 열린다. 그 사이 평양서는 한국정치인들이 못 가 안달이 난 6.15 통일 대축전이. 그리고 하순엔 남북장관급 회담이 열린다. 어떤 판도가 빚어질까.
“…6월을 잘못 보내면 이 정권의 남은 임기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회복하기 어려운 재앙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한 국내 신문의 전망이다. 올해도 6월은 유난히 긴 느낌이다.
옥 세 철
<논설위원>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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