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흑인 노예가 발을 디딘 것은 1619년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첫 영국 식민지인 제임스타운 부근을 항해하던 네덜란드 노예선이 식량이 떨어지자 이 마을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받고 20명의 노예를 판 것이 미국 노예제의 효시로 기록돼 있다. 그 후 150여 년이 지나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총성이 울려 퍼졌을 때쯤에는 이 제도는 남부 경제의 사활을 좌우할 정도로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노예제가 퍼지면 퍼질수록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갔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의 건국 이념과 노예제의 실상이 공존할 수 없음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이다. ‘독립 선언서’의 초안자이자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력한 토마스 제퍼슨은 “신이 정의롭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두렵다”며 노예소유자로서의 죄책감을 토로했다.
1775년 미국은 물론 서양 처음으로 노예 폐지협회가 펜실베니아에서 창립됐지만 남부 주들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의 노예제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이 참전했던 다른 모든 전쟁 사망자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낸 남북 전쟁을 치르고서야 끝장이 났다. 공식적인 노예제는 끝났지만 실질적인 흑인들의 생활상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남부 주들이 온갖 악법으로 흑인들의 자유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진정으로 노예제가 사라진 것은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한 1964년의 민권법과 1965년의 투표권법 통과 이후로 봐야 한다.
50~60년대가 흑인들이 인간 평등의 씨앗을 뿌린 시기였다면 70~80년대는 그 열매를 거둔 시기였다. 각 분야에서 흑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졌지만 그 중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대도시 시장선거였다. 1973년 탐 브래들리의 LA 시장 당선을 시작으로 1979년에는 매리온 배리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시청을 차지했다. 1983년에는 해럴드 워싱턴이 시카고 시장으로 당선됐으며 1990년에는 데이빗 딘킨스가 미 최대 도시 뉴욕의 행정 책임자가 됐다. 미국을 대표하는 주요 도시의 얼굴이 모두 검은 색으로 바뀐 것이다.
당연히 미국 언론은 ‘흑인들의 시대가 왔다’며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이들 흑인 시장들의 치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워싱턴은 백인 기득권층에 발목이 잡혀 처음부터 고생만 하다 재선되자마자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배리는 민권 운동가란 경력이 무색하게 마약을 하다 시장 직에서 쫓겨났다. 딘킨스는 흑인 시장으로서 인종 화합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한흑 갈등, 흑인-유대인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무능한 시장으로 낙인찍혀 단임으로 끝났다. 브래들리 역시 나중에는 매너리즘에 빠져 4/29 폭동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명예스럽지 못한 은퇴를 했다.
2005년 LA 시장 선거의 날이 밝았다. 현재로서는 지지도나 자금 면에서 안토니오 비아라이고사가 유리한 것 같이 보이지만 선거는 늘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결과를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미국 대도시에서 라티노 후보가 시장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어떤 인종보다 빠른 속도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투표 참여율도 꾸준히 높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 있을 뉴욕 시장 선거에서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페르난도 페러가, 2007년 열릴 시카고 시장 선거에서는 역시 라티노인 헤수스 가르시아가 각각 현재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꼽히고 있다.
지난 20년이 흑인 정치인 도약의 시대였다면 앞으로 20년은 라티노 파워의 시대라 봐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과거 흑인의 예를 보면 라티노 집권에 대한 지나친 우려도 기대도 잘못임을 알 수 있다. 백인에서 흑인, 라티노를 거쳐 먼 훗날 아시안 시장의 탄생은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이뤄 가는 한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고객과 종업원으로 어떤 인종보다 라티노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이번 시장 선거를 계기로 지금부터라도 스패니시를 배우고 라티노 친구들을 사귀어 두는 것이 미래에 대비하는 현명한 자세라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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