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직장 여성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최근에 장거리 출장을 다녀왔다는 말을 들었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가 일주일간 집을 비울 때 그것은 어떤 심리적 부담일까 - 우리보다 한참 젊은 이 세대는 출장을 가기 위해 집에서 어떤 절차를 거칠까 궁금했다.
“먼저 남편에게 물어보지요. ‘출장이 있는데 가도 돼?”하고 물었더니 남편이 ‘할 수 없지 뭐’그러더군요”
식구들 먹을 반찬 만들어 놓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 미리 챙겨놓느라 며칠 동동거리며 바쁜 것은 출장 전 언제나 거치는 기본 절차. 그런데도 출장을 가면서 남편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저녁마다 아이들 목욕시키고, 숙제 도와주고 … 할 일이 많으니까요. 평소 내가 하던 일을 남편이 잠시 하는 건데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남편은 출장 갈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나 출장 간다’하면 끝나지요”
그렇다면 ‘1세의 중년’인 우리 세대와 ‘1.5세의 30대’인 그의 세대와 기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이 아닌가. 가정 있는 직장 여성들에게 ‘출장’은 언제나 부담이다.
가족들의 심기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남편의 ‘허락’‘양해’ 혹은 ‘묵인’하에 출장을 가게 되면, 그저 반대 안 해준 것만 고마워 잔뜩 빚진 마음으로 떠났다가, 일 마치면 혼자 무슨 호강이라도 하고 온 듯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직장 여성들이 경험해온 일이다.
그에 비하면 남성은 참 모든 게 쉽기도 하다. 그 전날이라도 ‘출장 간다’통보만 하면 아내가 알아서 짐 챙기고, “먼길 잘 다녀오시라” 환송 받고, “객지에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느냐”며 대접받는 것이 주변에서 본 동료 남성들의 출장이다. 결혼을 통해 ‘남성은 얻지만 여성은 못 얻는 것’은 ‘와이프’라는 말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례이다.
그런 차이가 어린아이들의 눈에도 의아했을까? 한국의 여성부가 2주전 어린이 홈페이지에 올린 ‘엄마와 아빠의 차별’사례 중에 출장을 둘러싼 차이도 지적이 되었다.
여성부의 인터넷에 오른 가정 내 남녀차별 사례들은 3~4년 전 어린이들 사이에 떠돌던 이야기를 한 학계 인사가 모은 것이라고 한다. ‘성은 무조건 아빠의 성을 따른다’로부터 시작하여 ‘아빠는 벌써 부장으로 승진했는데 엄마는 아직도 말단 직원이다’까지 모두 19개 조항인데, ‘아빠를 나쁜 사람 만든다’는 네티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즉각 홈페이지에서 삭제되었다. 여성부가 조선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일들을 들먹인다며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요? ”라고 항의한 의견도 있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반말해도 엄마는 반말을 못한다’‘아빠는 화를 내도 엄마는 늘 참는다’등의 사례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은 사실 맞다. 친구 같은 부부가 많아지면서 서로 반말을 쓰고, 화가 나면 같이 화내는 부부가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똑같이 회사 갔다 와서도 아빠는 TV를 보거나 자지만 엄마는 바로 집안일을 한다’‘아빠는 일요일날 자주 외출하지만 엄마는 우리 때문에 못 나간다’‘아빠는 모임이 있으면 늦게 들어오지만 엄마는 그런 일이 있어도 일찍 들어와야 한다’‘아빠는 회사 일로 늦으면 엄마가 수고했다고 하는 데 엄마가 회사 일로 늦으면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한다’등은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일상사로 겪는 현실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평등이라는 선물을 주는 일이 남성들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근본적으로 내 몸 편하고 싶은 이기심 때문이라고 본다.
21세기는 부부의 고정된 역할이 허물어지는 시대라고 한다. 마라톤에서 바톤을 이어받듯이 부부가 상황에 따라 돈 벌기와 집안 일을 교대로 하는 패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 재계의 대표적 여성 50인 중 1/3은 남편이 집에서 가사를 전담한다는 통계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시대는 변하고 가정은 진화하고 있다. 우리 가정은 지금 어느 시대에 머무르고 있을까. 아직도 조선시대라면 좀 심하지 않을까?
권정희 논설위원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