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은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장점은 있는 것 같다. 한번 암기해서 머릿속 기억의 밭에 심어두면 그 생명력이 끈질기기가 들판의 질경이 같다. 어린 시절 내용도 모른 채 달달 외운 조각 지식들이, 당장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 중년의 부실한 기억력 속에서도 날 것처럼 생생하다. 유년의 기억이 갖는 힘이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물리의 해’이다. 100년 전인 1905년 26살의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상대성 이론으로 물리학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것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초부터 아인슈타인 이론이나 기념 행사에 관한 보도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때마다 수십 년 전 달달 외운 공식이나 용어들이 반갑게 되살아난다. 예를 들면 ‘특수상대성 이론’‘질량 에너지 등가 원리’같은 것들이다.
‘E=mc²’라는 공식으로 외운 ‘질량 에너지 등가원리’는 우리 주위의 온갖 물질들이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모든 물질은 특정한 양의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에너지(E)를 결정짓는 것이 질량(m)과 빛의 속력(c)이라고 공식은 설명한다.
공식으로 봐서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빛의 효과가 훨씬 크다.
비슷한 원리를 우리의 가정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가정의 ‘에너지’는 아무래도 가족 구성원의 행복감일 것이다. ‘질량’은 눈에 보이는 요인, 다시 말해 모든 물질적 여건으로 구성된 현실이 되겠다. 그리고 제곱으로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 ‘빛’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정신적인 것, 사랑이나 희생이 되지 않을까.
현실이 어려워도 희생을 동반하는 깊은 사랑이 있으면 충분히 가정의 행복은 성취될 수 있다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이런 특수한 ‘상대성 이론’을 생각하게 된 것은 며칠전 한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시카고에서 우체국 공무원으로 일하는 52살의 ‘혼자 사는 남성’이라고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전화는 2주전 나간 본 칼럼 ‘중년에 혼자 사는 남성들’이 남성에 대해 차별적 인상을 준다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성 중에도 혼자서 아이들 반듯하게 키우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13년 전 어느 날 그는 아내를 잃었다. 7살, 9살의 남매를 두고 아내가 집을 나가 버렸다.
“한 1년 동안 번민과 갈등으로 시달렸어요. 아내에 대한 분노는 2년 정도 가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내가 이렇게 곪고 썩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른다면 아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후 그는 아내에 대한 원망을 깨끗이 덮고,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를 잘못 만나 상처받은 아이들 - 내가 분명하게 희생해서 양부모 가정 못지 않게 키워내리라 결심을 했습니다”
자기 희생의 첫째는 재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친엄마 아닌 다른 여성이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기르리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그는 모든 시간을 아이들 교육을 위해 쏟았다. 거주지역 학군이 안 좋아서 남매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학비 마련을 위해 매주 오버타임을 하며 보통 60시간씩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피아노, 바이올린, 각종 스포츠 등 과외 활동에 아이들을 데려 주느라 근무시간을 짜 맞추며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나날이었지요. 신앙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기른 남매는 이제 둘 다 의젓한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다. 필생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마침내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껏 인생을 즐기는 중이라고 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사랑이라고 그의 소설에서 썼다. 가정은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사랑의 가장 깊은 경지,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이라고 본다. 희생 없이 유지되는 가정이 있을까?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자.
권정희 논설위원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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