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수 천명이라고 했다. 하루하루 그 숫자가 달라진다. 이 글을 쓰는 무렵에는 8만여명이다. 동남아시아를 덮친 대지진과 뒤따른 해일의 희생자 숫자다. 실감이 안 난다. 수 천명이라고 해도 그런데 만 단위도 넘어 이제는 10만을 바라보는 판이니.
말이 10만이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세계가 경악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몇 명이라고 했던가. 100만. 200만. 300만. 이쯤 되면 숫자는 통계일 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식이, 또 부모가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굶어 죽었다.
부시 대통령도 언급했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에서다. 노 대통령은 애써 그 가능성을 부인했고. 힐러리도 한 마디 했다. 김정일도 나름대로 그걸 학수고대했다. 그의 염원은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 그 상황을 타임지는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 ‘부시의 재선이 확정되는 순간 탄식 소리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평양에서, 베이징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그건 다름 아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다. 번역하면 체제변화, 정권교체라고 할까. blog. red state, blue state. 또 뭐가 있나. 하여튼 이런 단어들과 함께 2004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여진 말이다.
김정일이 바란 건 물론 ‘미국에서의 레짐 체인지’다. 부시는 북한의 레짐 체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했고, 힐러리는 직접어법을 구사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그리고 북한 주민의 좀더 나은 생활을 바란다면 누구나 원하는 게 북한의 정권교체’라는 식으로.
마치 유행어처럼 들린다. 네오콘이 전면으로 부상하면서 말이다. 이 레짐 체인지란 용어는 그러나 신조어가 아니다. 쓰인 지 오래됐다.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20세기는 민주화의 시대라고 불린다. 전후시기, 20세기 후반부가 특히 그렇다. 과거의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해 민주국가가 됐다. 뒤이어 80년대에는 아시아에서, 또 90년대에는 구 공산권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민주화는 세계화의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도 대세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화 행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프리덤 하우스 보고에 따르면 최근 들어 25개 국가에서 민주화로의 큰 진전이 있었다. 이로써 이제 전세계 총생산의 89%는 자유국가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보고다.
민주화의 시대는 체제변화, 다시 말해 ‘레짐 체인지 시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많은 국가들이 권위주의형 체제에서 민주체제로 전이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의 선두에는 항상 미국이 서 있었다.
이 민주화 시대, 다시 말해 레짐 체인지 시대를 맞아 국가 주권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절대적일 수 없다는 거다. 주권보다 우선하는 게 인권이기 때문이다. 기본권인 인권이 유린될 때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비유하면 이렇다. 이웃집에서 어린 자녀들이 맞아 죽어간다. 남의 가정 일이라고 방치만 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국민의 기본권을 극도로 탄압하는 체제는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실제의 상황을 보자. 참혹한 기근, 인종청소 등의 인재(人災)로 난민이 떼지어 일어난다. 이런 사태가 지난 20년간 87차례나 발생했다. 대부분이 혹독한 인권탄압 체제하에서다. 결국은 외부세력이 개입했다. 코소보사태. 르완다사태. 라이베리아, 아이티.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등의 상황이다.
혹독한 인재, 거대한 난민의 물결. 그 ‘최악 중 최악’의 샘플이 북한이다.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누가 그랬나. 북한 체제는 죽음의 동의어라고. 죽음의 뉴스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최소 100만에서 300만에 가까운 주민이 의도된 기아에 내몰려 죽었다. 그리고 수십만의 정치범과 탈북자들은 매일, 아니 순간, 순간 죽음과 싸우고 있다. 9도의 대지진이, 그리고 최악의 해일이 덮친 것보다도 더 혹독한 인재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체제다.
북한 핵 문제는 결국 체제의 문제다. 20년 가까이 평양과 핵 문제로 씨름을 한 결과 도출된 결론이다. 핵보다는 수령절대주의라는 그 체제의 사악한 본질이 문제라는 결론이다. 이 인식에는 공화, 민주가 따로 없다. 그러므로 해법은 하나로 귀결된다. 레짐 체인지다.
그리고 시그널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Going My Way’다. 친북(親北)노선에, 또 중국으로 기울고만 있는 한국을 ‘이탈한 동맹국’(runaway ally)으로 간주하면서까지 말이다.
2005년은 북한 민주화의 원년(元年)이 되지 않을까. 그 끔직한 죽음의 체제에 마침내 큰 변화가 생기면서…. 한 해를 마감하면서 문득 드는 예감이다.
옥 세 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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