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LA타임스를 무심코 펴들었다가 1면에서 눈에 익숙한 한국이름을 봤다. 이미연이란 여성의 이름과 그녀 몰래 LA로 입양처리 됐다는 26세의 아들 이동구, 그리고 그가 생부라고 주장한 한국 대기업 K그룹의 전 회장의 이름과 그들 사이에 얽힌 사연, 또 옛날과 현재의 사진들이 무려 3면에 걸쳐 도배가 되어 있었다.
‘고통스럽고 쓰라렸던 기억 편린 찾기’라는 제목으로 란초 쿠가몽가의 백인가정에 입양되어 살아왔던 한국계 미국 청년 동구가 자신에게 남아있던 기억의 정체를 찾아 헤맨 22년간이 자세히 그려졌다.
간추린다면 동구는 재벌기업 회장이 72세의 나이로 요정에서 만난 18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다. 회장 가계에 입적시킨다는 제안에 미혼모 엄마가 양육권을 포기하면서 4살 동구의 슬픈 여정이 시작된다. 아버지 집에서의 구박떼기 생활 3년후 회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동구는 홀트아동복지회 앞에 버려졌고 고아원을 거쳐 8살 때 남가주의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다.
검은 양복을 입은 누군가가 엄마 품에서 그를 강제로 떼어낸 4살 기억이나 또 그보다 훨씬 생생한 7살 때 버려진 기억을 지울 수 없는 동구의 입양후 생활은 양부모의 노력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불행했다.
“도대체 누가 나에게 왜 그랬을까” “난 왜 여기에서 원래의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엄마와는 왜 같이 살 수 없었나”등 잊을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무엇 때문에 그는 계속 괴로워했다. 아시안 외모를 혐오했고 아시안 음식이나 친구도 멀리 했다. 양부모에게도 물론 좋은 아들이 될 수 없었다.
그는 16살 때 양부모로부터 ‘생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본격적인 뿌리 찾기에 나섰다. 나름대로 양부모와 미국과 한국의 홀트 관계자들을 괴롭히며(?) 아버지의 기업의 현 회장 가족에게도 ‘나도 친자’라고 하소연 했다. 생부 유언을 집행한다며 10년전 그의 양부모에게 전달됐다는 10만달러 수령 증서도 내보이고 DNA 테스트를 해보이겠다는 데도 그쪽에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는 LA타임스 기자의 도움으로 생모를 22년만에 해후했고 이제 미국법에 의거해서라도 자신의 본연의 정체와 짓밟힌 권리를 찾겠다고 나섰다.
기자가 오랫동안 취재하고 한국, 캐나다까지 원정했던 이 신파소설 같은 스토리가 보도된 뒤 한인들은 “챙피하고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전에 재벌들이 으례 하던 짓이었다”고 했고 “아니 72세에도 아기를 낳았으면 건사할 조치를 미리 했어야지”라고 무책임을 나무랐다. “엄연한 핏줄인데 해외입양을 시켜버린 그 집안이 대단하다”고 혀를 찼고 대부분 “지금이라도 당연히 자식으로 인정해주고 상속도 해줘야 한다”고 했다.
여성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외부에서 들어 온 미운 자식이지만, 고아도 아니고 그것도 다 큰 직계를 내몰아 버린 가솔의 냉혹함을 성토했다. 해외입양이라는 수단이 안됐다면 눈엣 가시인 동구를 소리소문 없이 없애기 위해 무슨 일까지 했을까하며 몸서리를 쳤다. 며칠이 지나도 동구가 오랫동안 겪어온 고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돈을 노린 일방적 플레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시효만료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의 친자확인과정은 죽 떠먹기보다 쉬워 가짜 친자 주장은 어림없다. 또 자식과 부모 관계에 시효가 다 무엇인가? 돈 몇푼으로 핏줄을 끊고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일인가?
무엇보다 생모도 모르게 동구를 강제로 해외로 내몬 것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또 모든 기억이 선명해서 지구 반대편으로 입양된다 해도 새 가족이나 환경에 동화될 수 없는 그런 어린이를 ‘부모사랑 듬뿍 주기 위해’ 데려 온 양부모들의 입장은 또 무엇인가 말이다.
입양 한국계의 성공적 삶도 자주 보도되고 있다. 고아나 버려진 아기는 증가하고 국내입양은 어려우니 외국에 입양됨이 차라리 나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과 양부모의 사랑이 있어도 이들은 사춘기나 어느 시점에서 정체성과 뿌리 때문에 심한 갈등에 빠지고 비뚜러질 수 있다. 동구같은 이들의 절규를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오래전 어느 겨울, 동양인조차 전혀 없는 지역 주유소에서 만난 백인의 품에는 볼 빨간 한국 아기가 안겨 있었다. 아기의 눈동자는 우리 가족을 계속 쫓고 있었고 그 눈동자는 아주 오랫동안 눈시울을 젖게 했다.
이정인
국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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