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소(포트리)
이웃은 가족 다음으로 가까운 사이이다. 같은 지역에 살며 비슷한 희비애락을 겪어 온 유대관계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 사는 같은 한국인끼리의 이민이라도 뉴욕은 뉴욕에 사는 교포끼리가 더 정감이 간다. LA나 시카고에 멀리 떨어져 사는 동족보다는 말이다.
박지원, 그는 뉴욕 교포였다. 그래서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다도 마주치고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도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귀국하더니 대통령특보에, 국회의원에, 문광부장관에, 대통령비서실장등 권력의 핵심에서 돌고 돌았다.
그 때부터 뉴욕의 이웃이던 우리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편 의아스럽고 또 한편 부러웠다. 그러더니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정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수뢰죄를 져 차거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우리들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질 못한다. 왜? 미워도 고와도 뉴욕의 하늘아래서 맺은 이웃사촌이니까. 관심에서 울 수가 없다.
엊그제는 신문을 넘기다가 인사이드페이지에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볼과 턱은 길게 쳐지고 야윈 얼굴에 힘이라고는 검은 테 안경 속의 눈빛에 조금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게 누구지? 박지원씨 아냐! 너무나 변한 인상에 눈을 의심했다. 단정히 빗어 넘긴 긴 머리만 아니었으면 어느 스님의 얼굴로 착각할 뻔했다. 사람의 마음고생이라
는 것이 그토록 심한 모양이다.
“박지원씨‘현대 150억 수뢰’대법‘무죄취지’원심파기”-알듯 모를 듯한 제목이 붙었다. 불과 일년 반만의 수감생활이 저렇게 다른 사람 모습이 되다니, 불현듯 연민의 정이 일었다. “꽃이 진다고 바람! 을 탓할 소냐”-형무소 앞에 진을 친 기자들에게 그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여유가 남았던지 퍽이나 그럴듯한 옛 시구 한마디를 자신의 심경인양 뱉어 냈었다. 기
죽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저 모습이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에 나가지 말걸 그랬다. 부질없는 권력을 쫓지 말 것을 그랬다. 미미한 이민생활 일 망
정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마음 편하게 장사하고 골프 치고, 답답하면 서울에 한번씩 나가 바
람쐬면서 소박하게 살걸 그랬다. 이웃사촌 뉴욕교포의 생각으론 말이다.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생김새만큼이나 성격이 선선하고 언변도 좋고 수완도 좋았다. 그리고 일찍 이민 와서 비즈니스에 성공한 일부 교포중의 한사람이면서도 잘난 체 하지 않았다. 고개를 꼬고 다니지도 않았다. 소탈한 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기분 좋게 술 한잔 마시면 흥이 나서 콧소리를 내어 가수 심수봉이 부르는‘그 때 그 사람’을 잘 부르기도 했다.
뉴욕한인회 16대회장(1980~1982)이었던 그는 특히 노인 층에 성심을 보이기도 했다. 경로잔치도 넉넉하게 열 줄 알았고, 언제나 잔치가 열리면 강단에 올라 스스럼없이 넙죽넙죽 큰절도 잘 하면서“어르신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요”라고 덕담을 전하곤 했다. 그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노인들은“된 사람이야”라고 받았었다. 그랬던 박지원씨, 정권이 바뀌
고 그는 감옥에 들어갔다. 약도 얻고 병도 얻는 참으로 알 수 없는 권력의 풍토! 생각하기 따라서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이웃 사촌이던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이런 고사가 있다. 옛 중국 불세출의 병법가 손무(孫武)는 물러날 때를 안 사람이었다. 오(吳)나라 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의 힘을 얻어 초(楚)나라를 함락시키고 개선한다. 그리고는 정벌의 공이 제일 컸던 손무에게 높은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손무는 찾아 온 왕의 사신에게 “은퇴하겠다”는 말을 전한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오자서가 허겁지겁 달려와
“이제 큰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데, 어찌 장군은 떠나려 하시오?”이 말을 들고 손무는 “그대는 천도(天道)도 모르시오. ?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옵니다. 나라가 강성해지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쇄락해 지기 마련입니다. 한 개인의 일신도 마찬가지,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불행이 닥칠 겁니다. 병법의 극의(極意)가 물러날 때 물러 날줄 아는 겁니다. 그대 또한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오자서는 듣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결국엔 합려의 세자한테 미움을 사 자결하고 만다. 박지원, 그도 두 번 세 번씩 영광의 자리에 앉지 말고 한번으로 족히 여기고 미련 없이 털고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더라면 오늘과 같은 굴욕은 없었을 것을, 왠지 서울이 무정(無情)하게 느껴진다.
이 영 소 (포트리)
“고국이 無情하더라”
이웃은 가족다음으로 가까운 사이이다. 같은 지역에 살며 비슷한 희비애락을 겪
어 온 유대관계때문 일 것이다. 미국에 사는 같은 한국인끼리의 이민이라도 뉴욕은
뉴욕에 사는 교포끼리가 더 정감이 간다. LA나 시카고에 멀리 떨어져 사는 동족보
다는 말이다.
박지원 그는 뉴욕교포였다. 그래서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다도 마주치고 식당에 밥먹으러 가
서도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귀국하더니-, 대통령특
보에 국회의원에 문광부장관에 대통령비서실장등 권력의 핵심? 【?/SPAN> 돌고 돌았다.
그때부터 뉴욕의 이웃이던 우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편 의아스럽고 또한
편 부러웠다. 그러더니,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정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수뢰죄
를 져 캄캄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우리들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
나질 못한다. 왜 미워도 고와도 뉴욕의 하늘아래서 맺은 이웃사촌 이니까, 관심에
서 지울수가 없다.
엇그제는 신문을 넘기다가 인사이드페이지에서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볼과 턱은 길게 쳐지고 야윈 얼굴에 힘이라고는 검은테 안경속의
눈빛에 조금 걸린듯 한 모습이었다. 이게 누구지? 박지원씨 아냐! 너무나 변한 인
상에 눈을 의심했다. 단정히 빗어 넘긴 긴머리만 아녔으면 어느 스님의 얼굴로 착
각할 뻔 했다.
사람의 마음고생이라는 것이 그토록 심한 모양이다. “박지원씨 ‘현대150억수뢰’
대법 ‘무죄취지’원심파기”-알듯 모를듯한 제목이 붙었다.
불과 일년반만의 수감생활이 저렇게 다른사람 모습이 되다니, 불현듯 연민의 정
이 일었다.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 할소냐”-형무소앞에 진을 친 기자들에게, 그때
까지만 해도 일말의 여유가 남았던지 퍽이나 그럴듯한 옛시구 한마디를 자신의 심
경인양 뱉어 냈었다. 기죽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역했다. 그러더니, 저 모습이 무엇
이란 말인가…
한국에 나가지 말걸 그랬다. 부질없는 권력을 쫓지 말것을 그랬다. 미미한 이민생
활 일 망정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마음편하게 장사하고 골프치고, 답답하면 서울에
한번씩 나가 바람쐬면서 소박하게 살걸 그랬다. 이웃사촌 뉴욕교포의 생각으론 말
이다.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생김새만큼이나 성격이 선선하고 언변도 좋고 수완도 좋았다. 그리고 일찍
이민와서 비즈니스에 성공한 일부 교포중의 한사람이면서도 잘 난체 하지 않았다.
고개를 꼬고 다니지도 않았다. 소탈한 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기분좋게 술 한
잔 마시면 흥이나서 코소리를 내어 심수봉이 부르는 ‘그때 그사람’을 잘 부르기도
했다.
뉴욕한인회 16대회장(1980~1982)이었던 그는 특히 노인층에 성심을 보이기도
했다. 경로잔치도 넉넉하게 열줄 알았고, 언제나 잔치가 열리면 강단에 올라 스스
럼없이 넙죽넙죽 큰절도 잘 하면서 “어르신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요”라고
덕담을 전하곤 했다. 그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노인들은 “된사람이야” 라고
받았었다.
그랬던 박지원씨, 정권이 바뀌고 감옥에 들어갔다. 약도 얻고 병도 얻는 알수 없
는 권력의 풍토! 생각하기 따라서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이
웃사촌이던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이런 고사가 있다. 옛중국 불세출의병법가 손무(孫武)는 물러날 때를 안 사람이었
다. 오(吳)나라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의 힘을 얻어 초(楚)나라를 함락기키고 개선
한다. 그리고는 정벌의 공이 제일컷던 손무에게 높은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손
무는 찾아 온 왕의 사신에게 “은퇴하겠다”는말을 전한다. 이소식을 듣고 놀란 오자서
가 허겁지겁 달려와 “이제 큰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데, 어찌 장군은 떠
나려 하시오?” 이말을 들고 손무는 “그대는 천도(天道)도 모르시오. 여름이 가면 가을
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옵니다. 나라가 강성해지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쇠락
해 지기 마련입니다. 한개인의 일신도 마찬가지,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불행이 닥칠 겁 니다. 병법의 극의(極意)가 물러날 때 물러
날줄 아는겁니다. 그대 또한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오자서는 듣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 ?鳴?/SPAN> 결국엔 합려의 세자한테 미움을
사 자결하고 만다.
박지원, 그도 두번 세번씩 영광의 자리에 앉지말고 한번으로 족히 여기고 미련없이 털고 뉴
욕행 비행기에 올랐더라면 오늘과 같은 굴욕은 없? 珦?/SPAN> 것을-. 왠지 서울이 무
정(無情)하게 느껴진다.
이 영 소 (포트리)
“고국이 無情하더라”
이웃은 가족다음으로 가까운 사이이다. 같은 지역에 살며 비슷한 희비애락을 겪
어 온 유대관계때문 일 것이다. 미국에 사는 같은 한국인끼리의 이민이라도 뉴욕은
뉴욕에 사는 교포끼리가 더 정감이 간다. LA나 시카고에 멀리 떨어져 사는 동족보
다는 말이다.
박지원 그는 뉴욕교포였다. 그래서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다도 마주치고 식당에 밥먹으러 가
서도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귀국하더니-, 대통령특
보에 국회의원에 문광부장관에 대통령비서실장등 권력의 핵심? 【?/SPAN> 돌고 돌았다.
그때부터 뉴욕의 이웃이던 우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편 의아스럽고 또한
편 부러웠다. 그러더니,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정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수뢰죄
를 져 캄캄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우리들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
나질 못한다. 왜 미워도 고와도 뉴욕의 하늘아래서 맺은 이웃사촌 이니까, 관심에
서 지울수가 없다.
엇그제는 신문을 넘기다가 인사이드페이지에서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볼과 턱은 길게 쳐지고 야윈 얼굴에 힘이라고는 검은테 안경속의
눈빛에 조금 걸린듯 한 모습이었다. 이게 누구지? 박지원씨 아냐! 너무나 변한 인
상에 눈을 의심했다. 단정히 빗어 넘긴 긴머리만 아녔으면 어느 스님의 얼굴로 착
각할 뻔 했다.
사람의 마음고생이라는 것이 그토록 심한 모양이다. “박지원씨 ‘현대150억수뢰’
대법 ‘무죄취지’원심파기”-알듯 모를듯한 제목이 붙었다.
불과 일년반만의 수감생활이 저렇게 다른사람 모습이 되다니, 불현듯 연민의 정
이 일었다.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 할소냐”-형무소앞에 진을 친 기자들에게, 그때
까지만 해도 일말의 여유가 남았던지 퍽이나 그럴듯한 옛시구 한마디를 자신의 심
경인양 뱉어 냈었다. 기죽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역했다. 그러더니, 저 모습이 무엇
이란 말인가…
한국에 나가지 말걸 그랬다. 부질없는 권력을 쫓지 말것을 그랬다. 미미한 이민생
활 일 망정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마음편하게 장사하고 골프치고, 답답하면 서울에
한번씩 나가 바람쐬면서 소박하게 살걸 그랬다. 이웃사촌 뉴욕교포의 생각으론 말
이다.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생김새만큼이나 성격이 선선하고 언변도 좋고 수완도 좋았다. 그리고 일찍
이민와서 비즈니스에 성공한 일부 교포중의 한사람이면서도 잘 난체 하지 않았다.
고개를 꼬고 다니지도 않았다. 소탈한 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기분좋게 술 한
잔 마시면 흥이나서 코소리를 내어 심수봉이 부르는 ‘그때 그사람’을 잘 부르기도
했다.
뉴욕한인회 16대회장(1980~1982)이었던 그는 특히 노인층에 성심을 보이기도
했다. 경로잔치도 넉넉하게 열줄 알았고, 언제나 잔치가 열리면 강단에 올라 스스
럼없이 넙죽넙죽 큰절도 잘 하면서 “어르신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요”라고
덕담을 전하곤 했다. 그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노인들은 “된사람이야” 라고
받았었다.
그랬던 박지원씨, 정권이 바뀌고 감옥에 들어갔다. 약도 얻고 병도 얻는 알수 없
는 권력의 풍토! 생각하기 따라서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이
웃사촌이던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이런 고사가 있다. 옛중국 불세출의병법가 손무(孫武)는 물러날 때를 안 사람이었
다. 오(吳)나라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의 힘을 얻어 초(楚)나라를 함락기키고 개선
한다. 그리고는 정벌의 공이 제일컷던 손무에게 높은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손
무는 찾아 온 왕의 사신에게 “은퇴하겠다”는말을 전한다. 이소식을 듣고 놀란 오자서
가 허겁지겁 달려와 “이제 큰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데, 어찌 장군은 떠
나려 하시오?” 이말을 들고 손무는 “그대는 천도(天道)도 모르시오. 여름이 가면 가을
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옵니다. 나라가 강성해지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쇠락
해 지기 마련입니다. 한개인의 일신도 마찬가지,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불행이 닥칠 겁 니다. 병법의 극의(極意)가 물러날 때 물러
날줄 아는겁니다. 그대 또한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오자서는 듣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 ?鳴?/SPAN> 결국엔 합려의 세자한테 미움을
사 자결하고 만다.
박지원, 그도 두번 세번씩 영광의 자리에 앉지말고 한번으로 족히 여기고 미련없이 털고 뉴
욕행 비행기에 올랐더라면 오늘과 같은 굴욕은 없? 珦?/SPAN> 것을-. 왠지 서울이 무
정(無情)하게 느껴진다.
이 영 소 (포트리)
“고국이 無情하더라”
이웃은 가족다음으로 가까운 사이이다. 같은 지역에 살며 비슷한 희비애락을 겪
어 온 유대관계때문 일 것이다. 미국에 사는 같은 한국인끼리의 이민이라도 뉴욕은
뉴욕에 사는 교포끼리가 더 정감이 간다. LA나 시카고에 멀리 떨어져 사는 동족보
다는 말이다.
박지원 그는 뉴욕교포였다. 그래서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다도 마주치고 식당에 밥먹으러 가
서도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귀국하더니-, 대통령특
보에 국회의원에 문광부장관에 대통령비서실장등 권력의 핵심? 【?/SPAN> 돌고 돌았다.
그때부터 뉴욕의 이웃이던 우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편 의아스럽고 또한
편 부러웠다. 그러더니,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정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수뢰죄
를 져 캄캄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우리들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
나질 못한다. 왜 미워도 고와도 뉴욕의 하늘아래서 맺은 이웃사촌 이니까, 관심에
서 지울수가 없다.
엇그제는 신문을 넘기다가 인사이드페이지에서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볼과 턱은 길게 쳐지고 야윈 얼굴에 힘이라고는 검은테 안경속의
눈빛에 조금 걸린듯 한 모습이었다. 이게 누구지? 박지원씨 아냐! 너무나 변한 인
상에 눈을 의심했다. 단정히 빗어 넘긴 긴머리만 아녔으면 어느 스님의 얼굴로 착
각할 뻔 했다.
사람의 마음고생이라는 것이 그토록 심한 모양이다. “박지원씨 ‘현대150억수뢰’
대법 ‘무죄취지’원심파기”-알듯 모를듯한 제목이 붙었다.
불과 일년반만의 수감생활이 저렇게 다른사람 모습이 되다니, 불현듯 연민의 정
이 일었다.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 할소냐”-형무소앞에 진을 친 기자들에게, 그때
까지만 해도 일말의 여유가 남았던지 퍽이나 그럴듯한 옛시구 한마디를 자신의 심
경인양 뱉어 냈었다. 기죽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역했다. 그러더니, 저 모습이 무엇
이란 말인가…
한국에 나가지 말걸 그랬다. 부질없는 권력을 쫓지 말것을 그랬다. 미미한 이민생
활 일 망정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마음편하게 장사하고 골프치고, 답답하면 서울에
한번씩 나가 바람쐬면서 소박하게 살걸 그랬다. 이웃사촌 뉴욕교포의 생각으론 말
이다.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생김새만큼이나 성격이 선선하고 언변도 좋고 수완도 좋았다. 그리고 일찍
이민와서 비즈니스에 성공한 일부 교포중의 한사람이면서도 잘 난체 하지 않았다.
고개를 꼬고 다니지도 않았다. 소탈한 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기분좋게 술 한
잔 마시면 흥이나서 코소리를 내어 심수봉이 부르는 ‘그때 그사람’을 잘 부르기도
했다.
뉴욕한인회 16대회장(1980~1982)이었던 그는 특히 노인층에 성심을 보이기도
했다. 경로잔치도 넉넉하게 열줄 알았고, 언제나 잔치가 열리면 강단에 올라 스스
럼없이 넙죽넙죽 큰절도 잘 하면서 “어르신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요”라고
덕담을 전하곤 했다. 그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노인들은 “된사람이야” 라고
받았었다.
그랬던 박지원씨, 정권이 바뀌고 감옥에 들어갔다. 약도 얻고 병도 얻는 알수 없
는 권력의 풍토! 생각하기 따라서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이
웃사촌이던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이런 고사가 있다. 옛중국 불세출의병법가 손무(孫武)는 물러날 때를 안 사람이었
다. 오(吳)나라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의 힘을 얻어 초(楚)나라를 함락기키고 개선
한다. 그리고는 정벌의 공이 제일컷던 손무에게 높은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손
무는 찾아 온 왕의 사신에게 “은퇴하겠다”는말을 전한다. 이소식을 듣고 놀란 오자서
가 허겁지겁 달려와 “이제 큰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데, 어찌 장군은 떠
나려 하시오?” 이말을 들고 손무는 “그대는 천도(天道)도 모르시오. 여름이 가면 가을
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옵니다. 나라가 강성해지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쇠락
해 지기 마련입니다. 한개인의 일신도 마찬가지,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불행이 닥칠 겁 니다. 병법의 극의(極意)가 물러날 때 물러
날줄 아는겁니다. 그대 또한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오자서는 듣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 ?鳴?/SPAN> 결국엔 합려의 세자한테 미움을사 자결하고 만다.
박지원, 그도 두번 세번씩 영광의 자리에 앉지말고 한번으로 족히 여기고 미련없이 털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더라면 오늘과 같은 굴욕은 없? 珦?/SPAN> 것을-. 왠지 서울이 무정(無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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