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여행
지난 주말 가깝게 지내는 몇 집과 함께 옥스나드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에 모여 일요일 낮에 헤어졌으니 사실 여행이랄 수도 없는 단촐한 나들이였지만, 오랜만에 밤을 지새며 먹고 놀고 떠들며 가족간 우정을 돈독히 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연말 망년회 분위기도 띠고 해서, 우리는 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고, 지난 한 해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숙연한 분위기도 연출했으며, 남편들의 서프라이즈 선물 증정이 아줌마들을 감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좋은 시간들 가운데서도 나는 반드시 유감스런 부분을 찾아내고야 말았으니, 어쩔 수 없는 기자근성 때문일까.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두끼 식사를 위해 준비하고 치러야했던 먹는 일의 번거로움을 겪으며, ‘한국식 여행’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숙박한 곳은 2층 콘도식으로 지어진 매리옷 호텔로, 각 유닛마다 부엌과 냉장고, 기본적인 식기구가 딸려있고, 아래 위층에 침대 2개와 욕실 2개가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우리는 이 스위트룸을 2개 빌려서 한방에는 남편 4명과 사내아이 4명, 다른 한방에는 아내 4명과 딸들 4명이 투숙하였다. 그러자 여자들의 방은 순식간에 부엌이자 식당으로 변하였다.
토요일 저녁 메뉴는 불고기, 일요일 아침 메뉴는 콩나물국이었는데 이를 위해 LA에서부터 공수해간 식품들을 적어보면 이렇다. 불고기 15파운드에 상추·깻잎·쑥갓·오이·고추가 대형박스로 하나가득, 아이들용 소시지 4팩, 콩나물 2팩, 무 2개, 밑반찬 대여섯가지, 김치와 쌈장, 김 다섯팩, 소다 48캔과 물(갤런) 3통, 각종 과자, 귤과 감 한 박스씩이었다.
일회용 용기도 엄청나서 접시, 보울, 젓가락, 숟가락, 컵, 냅킨들이 각자 수백개의 벌크 사이즈로 쌓였다. 그리고 집집마다 아이스박스에 냄비, 전기 프라이팬, 전기밥통 2개가 동원됐고, 콩나물국 당번이었던 나는 대형 냄비와 육수, 멸치, 파, 마늘, 양념들을 싸들고 갔다.
여자들은 시간별로 들이닥치는 사람들에게 고기와 소시지를 구워주느라 부엌에서 계속 서성였다. 식사 후에는 과일을 깎고 커피를 끓였으며 한 옆에서는 다음날 먹을 국을 끓였다.
다음날 아침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어나는 순서대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국을 덥히면서 김을 자르고 남은 반찬들을 차려냈다.(그런데 그 호텔은 투숙객들에게 컨티넨탈 브렉퍼스트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두끼 먹은 쓰레기 또한 엄청났다. 아이들은 소다를 따서 한두 모금 마시고는 여기저기 버려두었고, 일회용 식기를 손쉽게 집어쓰고 아무렇게나 버렸으므로 캔과 컵과 접시와 보울들이 엉켜서 그 부피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산처럼 쌓인 쓰레기 봉지들을 그냥 두고 가면 망신이 될 것을 우려해 세사람이 바리바리 나눠들고 호텔 한 구석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까지 찾아가 버리고서야 체크아웃을 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서, 음식과 비품이 잔뜩 남았으므로 이를 각자 나누고 차에 싣는 일로 또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나는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너무 많은 음식 쓰레기와 일회용 식기가 함부로 마구 버려지는 모습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더구나 정토회에서 벌이는 ‘빈그릇 운동’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으로서 보통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불고기와 콩나물국을 꼭 여행지에서, 호텔방에서, 그 모든 짐을 다 이고 가서 해먹어야 했을까? 집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들 아닌가? 만일 다같이 모여서 먹는 재미를 추구했다면 굳이 멀리 가지 않고 누구네 모여서 해먹었어도 되는 일 아닌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왠지, 누구에겐지 굉장히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프리웨이를 달리는데 옆으로 ‘인 앤 아웃’ 햄버거집이 보인다. ‘우리가 어제 저녁 저기 가서 햄버거를 하나씩 사먹고,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주는 브렉퍼스트를 먹었다면 이 여행이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생각했다.
짐도 없고, 장볼 것도 없고, 요리할 필요도 없으며, 버리고 나눌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얼마나 절약되었을 것이며 그동안 얼마나 더 좋은 시간을 보냈을 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여행의 의미를 ‘한국음식’ 해먹는 데서 찾기보다, 자연과 여유를 즐기는 데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함께 갔던 분들은 모두 한국일보 독자로서 주방일기도 열심히 읽는 분들이라, 글을 쓰고 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된다.
“먹기는 제일 잘 먹어놓고 돌아와서 딴소리한다”고 야단들 하실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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