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얼마전 ‘철인’ 임무성씨 부부와 저녁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해프 마라톤을 뛴 우리 남편 이야기를 읽고, 격려도 해줄 겸 꼭 만나고 싶다며 우리를 초청한 것이다.
임씨는 전에 내가 종교담당 기자였을 때 그분이 다니는 성당 홍보일로 만났는데, 우연한 기회에 3종경기 선수라는 사실을 알게되어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50대 철인’으로 우리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소개한 바 있다.
그때 이후 ‘철인’으로 불리는 임씨는 이제껏 마라톤 완주 횟수만 71회, 최고 기록은 2시간47분이라니 보통 1등이 2시간20분대인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3종경기(Triathlon)가 무엇인지 소개하면 바다수영을 2.4 마일 하고, 이어 자전거로 112 마일을 달린 후, 풀 마라톤 26.2 마일을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뛰는 경기를 말한다.
보통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로서 아침 7시에 출발해 그날 밤 자정안으로 결승점에 들어와야 등수 안에 든다고 한다. 임씨는 97년 샌디에고 국제철인경기에서 13시간20분의 기록으로 출전자 1,650명중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하루 종일 달리면 밥은 언제 먹느냐고 했더니 자전거 탈 때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시간으로, 자전거를 밟으며 자원봉사자들이 손을 뻗어 전해주는 음식들을 한 손으로 기술적으로 낚아채야 한다고 하였다. 낚아채기에 성공하면 먹을 수 있지만 놓치면 뒤로 돌아가던가, 굶던가 둘중 하나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화장실엔 언제 가느냐고 했더니 단 한번도 갈 일이 없다고 하였다. 땀을 워낙 많이 흘리기 때문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씨는 왜 그렇게 사정없이 뛰는 것일까?
“너무 재미있어요.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뛰는 인생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매일 뛸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육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달립니다”
그는 또 달리기는 치유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전 그는 LA에서 첵캐싱 마켓을 운영할 때 강도를 당했다. 권총과 샷건을 든 강도 8명이 한꺼번에 들어와 등에 총을 대더란다.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했던 그는 그러나 강도들이 가버리자 마음속에 밀려오는 엄청난 분노와 억울함과 굴욕감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운동화를 신고 뛰쳐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모든 고통과 잡념이 날아가 버렸고, 집에 돌아오니 기분이 완전히 안정돼 단잠을 잘 수 있었다며 그때 달리지 않았다면 그 괴로움을 치유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씨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달리기는 중독현상을 일으키는 것 같다. 쉬지 않고 달리면 힘든 고비를 넘기는 어느 순간부터 잡념이 없어지고 환희를 느끼는데 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때문에 한번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은 골프도 그만 두고 달리기만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들은 누구든 만나면 달리기 이야기를 하려는 경향이 있고, 이를 몇번 당해본 사람은 달리기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 못지 않게 질리는 주제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나의 남편도 작년에 처음 뛰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재미를 붙이자 마치 자신이 마라톤 선수라도 되는 듯한 자세로 대화에 임하였다. 그런데 나한테는 씨가 잘 안 먹히자 어머니께로 옮겨갔고, 어머님도 큰 관심을 안 보이자 결국 그 대상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되었다.
남편이 뛰는 모임의 코치인 스티브 박씨도 마치 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거의 매일 고행과도 같은 훈련을 반복하는데, 그 역시 사람을 만나면 오로지 달리기만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간다고 한다.
최근에는 우리 편집국의 김정섭 부장이 ‘달리기 전도사’가 되었다. 몇 달전 의사에게 당뇨가 좀 있다는 진단을 받고는 토요일 아침마다 뛰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 사람만 보면 붙들고 함께 뛰자고 조르는 통에 동료들 사이에 기피인물로 찍혀버린 것이다.
철인 임무성씨는 오는 22일 사이클링 대회에 출전하고, 12월에는 OC 마라톤, 내년 2월엔 헌팅턴 비치 마라톤에서 뛴다고 한다.
그런데 이 주방일기에 자꾸 달리기 이야기를 쓰는 나는? 러닝머신 위에서 5분을 못 달리는 ‘달치’임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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