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1년이면 비 내리는 날이 열흘 남짓 되는 남가주에 때아닌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면서 센티멘탈 모드로 젖어들고 한편으로는 몹시 설레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비도 눈도 그다지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하늘 파랗고 맑은 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내가, 비오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좋아하게 된 것은 엘에이로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이다.
봄과 가을이 특별히 아름답던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주에서 엘에이로 이사온 후 매일 계속되던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처음에는 감격해 하다가 한 달이 좀 지나면서 질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사 후유증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날씨 때문에 우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가 올지 눈이 올지 모를 잔뜩 수분을 머금은 컴컴한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고, 창문을 열면 코가 찡하도록 쌀쌀한 바람이 느껴지는 날, 눈을 가늘게 떠야 살짝 보이는 입김을 내뿜으며, 털이 북실한 슬리퍼를 신고 커피 한 잔 뽑아서 듣던 바하와 브람스와 슈만과 슈트라우스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기 시작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비가 올 기미만 보여도 나는 가슴이 뛰고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들을 음악들을 고르느라 바쁘고, 괜스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지고, 타운에 나가서 삼겹살을 먹을까, 친구들을 불러다가 같이 전이나 부쳐먹을까 등등 평소에 안 떠오르던 생각들로 머릿속 마저 분주하다.
비가 온다고 해서 연습을 안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의 연습은 맑은 날의 연습과 뭔가 다르다. 전에는 한 번도 치고 싶지 않던 곡들을 배우고 싶은 열정이 생기기도 하고, 나만의 세계에 좀 더 깊이 빠져서 연습하는 시간이 친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오는 날 꺼내들고 연습했던 곡들을 맑은 날씨에 다시 연습하려고 하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이 빠지는 것은 비가 가져다주는 후유증 중 하나이다.
학부 재학 중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셋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런던에, 하나는 뉴올리언스에, 하나는 미시간주에 살고 있다. 17세, 18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져서 또래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밥을 먹고 세상을 배우던 때에 사귀었던 친구들이라 서로 얼굴을 못 본지 오래 되었지만, 가끔 연락을 해도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따스해지는지 모른다.
특별히 내가 다니던 학교는 모든 전공 학생들을 다 합해도 전교생이 500명이 안 되었고, 우리 학년 피아노과 전공은 7명밖에 안됐기 때문에, 동기생들과는 1주일 내내 레슨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4년을 보냈으니 그 친밀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중 미시산에서 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와 첫 비가 내리던 저녁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그녀가 연주한 슈만 피아노 협주곡이 CD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곧이어 CD가 하나 더 나오니 그 때 같이 부쳐주겠다고 했지만 기다릴 수 없으니 빨리 부치라고 성화를 했다. 그리고 밤새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추고 어두운 하늘이 그 다음 비를 불러오느라 꾸물거리고 있는 오늘, 그 CD를 받았다.
그 친구는 우리 학년에서 가장 우수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다.
연습에 임하는 성실한 자세를 따를 자가 없었고, 아버지 어머니가 다 피아니스트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기초가 더 할 수 없이 탄탄한 친구였기에,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줬던 친구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항상 연주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그래서 우리 친구들 모두가 그녀의 연주를 좋아했었다.
까다로운 부분에서도 혹시 틀릴까봐 속도를 늦추지 않는 그녀의 무모할 정도의 화끈함과 정열이 자극적이었고, 그녀의 심성에서 우러나는 따스하고 풍만한 톤과 로맨틱한 프레이징이 참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졸업 리사이틀에서 연주했던 슈만의 ‘다윗 동맹 무곡’은 내게 잊기 힘든 감동으로 남아있다.
조심스럽게 CD를 뜯어보니 포스트잇이 한 장 붙어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다윗 동맹 무곡’ 연주도 함께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실내 온도가 약간 쌀쌀하게 느껴졌지만, 바깥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직도 축축한 땅에서 전해져 오는 비내음과 함께 친구가 연주하는 슈만을 들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차가운 공기를 가로지르며 전해지는 슈만을 듣던 그 한시간 동안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또 비가 온다고 하니, 갑자기 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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