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에 먼저 눈이 간다. 케리냐. 부시냐. 박빙의 접전. 대권향방에만 관심이 쏠린다. 그러다 보니 누가 연방상원의원에 도전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왜 이토록 미국의 대선에 마음이 끌리는 걸까.
온통 대선 관계 뉴스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이런 상황에 신문의 한 면을 차지했다. 폴 니츠에 대한 기사다. 전후 냉전전략을 기초했다. 9명의 대통령과 함께 일했다. 마셜 플랜 입안자다. 쿠바위기를 극복했다. 소련과의 핵 군축을 적극 추진했다. 간단히 소개된 경력만 이 정도다.
97세로 사망한 니츠의 부고기사다. 니츠를 딘 애치슨, W. 애버릴 해리먼, 존 맥로이, 조지 케난 등과 나란히 놓았다. 이들은 전후 미국의 시대를 여는데 주역을 맡았던 안보전략의 거장들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마지막 현자(賢者)가 타계했다는 것이다. 지극한 헌정사다.
니츠가 1950년에 기초한 NSC68이라는 안보보고서는 이제 전설이 돼 있다. 대 소련 전략문서인 이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실체를 일찍이 ‘악’으로 규정했다. 봉쇄가 그 핵심 내용이다. 군사적으로 정면 대치하는 구도에서 자유 세계의 다른 무기, 즉 인권과 자유정신을 불어넣음으로써 소련의 내부로부터 변화를 유도한다는 전략이다. 반세기 후 결국 소련은 붕괴했다.
시대를 앞질러 내다보는 혜안도 혜안이다. 그러나 정작 더 관심이 가는 대목은 그가 드나든 미국 정치의 뒤안길이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관계가 없다. 미국의 국익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대통령들로부터 자문을 요구받았다.
“현자들은 오고, 또 간다. 그러나 폴 니츠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조지 슐츠의 말이다. 현자가, 사회의 원로가 말하면 대통령은 듣는다. 그가 60년을 항상 권력과 함께 할 수 있게 했던 이유다.
니츠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현자로 떠받들리는 원로가 한국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가정법이지만 그 현자의 비전이 현실화되는 정치가 과연 가능한지 뭐 그런 생각이 불현듯 스쳐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도대체가 가망이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멍청한 질문에 뻔한 답을 중얼거리는 것 같지만 말이다.
우선 원로, 현자라는 게 그렇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여정에, 업적에 존경이 가야한다. 굴곡이 많았던 정치환경이었다. 그런 토양에서 원로로 존경받는 인물이 만들어진다는 것, 그 자체가 어렵다. 그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그렇다고 ‘원로’라고 부를 인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오랜 고난의 세월을 빛의 역할을 해오며 견디어온 종교지도자가 있다. 묵묵히 교육 일선에 몸바쳐온 교직자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권위는 철저히 무시되는 세태다.
김수환 추기경이 나라를 걱정하는 발언을 했다가 수구니, 걸림돌이니, 홍위병 식으로 마구잡이 인신공격을 당한 게 봄의 일이었던가. 각계 원로가 연명을 해 시국선언을 하자 ‘웃기는 늙은이들’이라는 홍소와 함께 배격을 당한 게 가을의 일이고.
세태가 이러하므로 ‘현자의 비전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자체가 망상에 가깝다는 자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권위란 권위는 죄다 무너뜨리고 있을까.
사회의 우상, 거기다가 권위란 권위가 다 무너진 벌판에는 우중(愚衆)을 앞세운 권력의 바람만 휘몰아친다. 프랑스의 석학이 한 말이던가. 포인트는 거기에 있지 않을까.
“국회의 권능이 손상됐고 정치 지도자와 정치권 전체가 타격을 입었다.” “앞으로 국회의 입법권이 헌재에 의해 무력화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헌정질서의 혼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재판소의 수도 이전 위헌판결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누구도 (헌재 결정의) 법적 효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첫 발언이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헌재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 같았다. 뜸을 들이더니 말이 달라진 것이다. 억울한 심정이 신념 비슷한 것으로 바뀌면서 결국은 진심을 토로한 것이다.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무슨 의도인가. 역시 권위를 무너뜨리겠다는 거다.
사회 원로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다. 헌법 재판소라는 ‘제도화된 권위’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뒤에 오는 건 그러면 뭘까. 앞서 인용한 말을 다시 되새겨 보자. “…제도화된 권위까지 무너진 벌판에는 폭민(暴民)을 동원한 권력의 바람만 휘몰아친다.”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그나저나, 미 대통령 선거에 왜 그토록 관심을 쏟는 걸까. 선거 결과가 한국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줄까 하는 기대심에서인가. 이 역시 바람을 쫓는 헛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옥 세 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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