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렬(교육가)
한국에서 교직에 있었을 때, 10월은 신나는 계절이었다. 공휴일이 셋이나 있었다. 3일은 개천절, 9일은 한글날, 24일은 유엔데이였기 때문에 수업하는 날이 적었다. 일주일 동안 6일을 일하던 사람들에게 거듭되는 공휴일은 감미로운 간주곡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글날이 국경일에서 빠졌다고 한다. 웬일로 숨어버린 것인가.미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살 때보다 감사하는 일이 늘었다. 삶의 형태가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점, 인종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 사용하는 말의 종류 만큼 글자 수효가 많지 않다는 것들을 깨닫게 된 일이 이에 포함된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한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만약 한국에서만 살고 있었다면 이 정도로 한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간절하였을까. 한국에서는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는 물음이 우리에겐 어이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큰 관심사이다. 그들은 다음 질문에서 ‘그럼 글자는 어느 나라 것을 쓰느냐?’고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한다. 한국의 역사를 어슴푸레하게 알고 있는 그들에게는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서로의 문
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 때마다 한국인이 한국말을 사용하고, 글자는 ‘한글’을 사용한다고 가슴을 펴며 대답을 할 수 있음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외국인에게 한글 자모를 가르쳐 줄 때도 ‘한글’의 뛰어남을 설명하면서 정성을 기울일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한국 내에서만 살았다면 이런 느낌을 갖지 못하였을 줄 안다. 한국말·한글은 마치 일상 생활에서 숨쉬는 공기
와 같았으니까.
미국에서 맞이한 한글날, 학생들이 세종대왕께 편지를 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인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섞여 있었다. ‘IQ가 굉장히 높으신가 봐요, 어떻게 한글을 발명하셨어요?’ 그래서 주시경 선생님 지으신 ‘한글’이란 이름의 글자는 하나 밖에 없는 바른 글·큰 글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현대의 생활 필수품인 컴퓨터는 한글을 위하여 만들어진 기계인가. e-메일을 받거나 보낼 때마다 이런 착각을 하게 된다. ‘한글’은 이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하고 창제되었는가 라는 의문도 가져본다. 이러한 느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또한 ‘한글’의 장점이다. 한글은 디지털 시대에 맞는 기호이다.
언젠가는 말만 있고 글자가 없는 작은 나라 한 부족이 사용하는 ‘떼뚠말’ 표기에 한글을 빌려 쓰기로 합의하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글은 자모 수효가 적으면서 거의 어떤 소리든지 적을 수 있는 표현의 기능이 뛰어남을 말하고 있다.
요즈음 한류(韓流)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한국 영상 문화가 동남아를 비롯하여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즉 한국문화의 우수성이 점차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우게 되면 또 한 번 놀라게 될 것이다. 이렇게 편리한 소리글자가 있는가 하고. 한글은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쉬운 훌륭한 글자이다.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공헌할 수 있는 값진 문화 자산인 것이다.
학생들에게 ‘한글날’이란 한글의 생일이라고 알린다. 그러면 학생들은 생일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생일 축하합니다/생일 축하합니다/사랑하는 우리 한글/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소리가 교실 안에 퍼진다. 금년 2004년, 한글은 558세가 된다.
그동안 한글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건재하다. 이 한글이 남북한·한국 내외의 한국인을 한데로 묶고 있다. 한글이 있어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라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국가적 보물을 대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국경일은 아니지만, 한글날이니까 보통날은 아니에요’ 한국에 확인 전화를 했을 때 상대방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한글날’은 보통날과 국경일 사이의 자격을 가진
날이라는 뜻인가. 말은 되지만 납득할 수는 없다.
문득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본다.
극장 객석에서 누군가가 외친다. ‘어머, 여기 주연급이 분명한 분이 앉아 계셔요’ 주위 사람들이 덩달아 소리친다. ‘어서 무대 위로 올라가세요. 여기는 객석이잖아요’ 국경일 무대에서 밀려나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한글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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