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는 친일 청산 논쟁이 한창이고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냉전 이후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이에 때맞춰 제국주의의 공과 과에 관한 평가를 다룬 책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영국의 사가 닐 퍼거슨이 쓴 ‘제국’이 그것. 영국 제국주의가 인류에 끼친 공이 해보다 크다는 주장을 펼쳐 논란을 빚고 있는 이 책의 요지를 살펴본다
<민경훈 논설위원>
‘엠파이어’(Empire)
닐 퍼거슨
제국주의, 순수한 악인가
19세기 ‘영국의 평화’세계화 발판 마련
영국 식민지 해방후 민주주의 성공 높아
노예제 폐지·과부 살해 금지에도 기여
1999년 아프리카 가나에서 노예 배상에 대한 세계 대회가 열린 일이 있다. 이 대회 참석자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로 팔려간 흑인 수를 1,000만명으로 추산하고 서방 각국은 777조달러의 배상금을 낼 것을 요구했다. 미 연 GDP가 10조달러가 조금 넘으니까 이 요구를 들어주려면 미국인이 70년 동안 생산해 낸 모든 재화를 내놓아야 한다. 배상 총액 중 가장 큰 액수를 물어 줘야할 나라는 영국이었다. 전체 노예의 ⅓이 영국 배를 탔기 때문에 총 배상액의 ⅓은 영국이 내야 한다는 논리였다.
노예 무역이 한창이던 19세기는 ‘영국의 평화’(Pax Britannica)로 불리던 시기다. 당시 영국은 지구 면적의 ¼을 지배하며 3억5,0000만명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부터 제1차 대전이 시작된 1914년까지 영국 해군은 ‘무적 함대’로 5대양을 누비며 영국 주도의 질서를 확립했다.
지금은 영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처럼 돼 있다. 그러나 과연 영국의 제국주의가 인류 발전에 악영향만을 끼친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가 ‘제국’을 쓴 영국의 사학자 닐 퍼거슨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식민지 착취와 인종 차별 등 폐해에도 불구 영국의 제국주의는 인류에게 실보다 득을 가져다줬다고 주장한다. 옥스퍼드와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최근 월스트릿 저널에 ‘어째서 부시가 떨어지는 것이 공화당에 유리한 가’에 관한 글을 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세기는 그 이전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 전 세계적으로 인간과 물자의 이동이 자유로웠던 시기다. 이 때는 또 인류가 가장 빠른 경제 발전을 경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관세 장벽과 온갖 규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방해함으로써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영국의 힘을 배경으로 법치주의와 의회 민주주의, 재산권 보호 및 자유 무역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세계화와 경제 발전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퍼거슨은 영국의 지배가 사회적으로도 인류 발전에 기여했다고 믿고 있다. 인류 문명 탄생과 함께 수천 년 간 세계 전역에 퍼져 있던 노예제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며 그 폐지의 선봉에 선 사람들은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도들이다. 19세기초까지 노예 무역에 앞장섰던 영국인들은 노예제의 해악과 실상이 알려지면서 그 폐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 때 노예 무역선 선장을 하다 참회하고 ‘Amazing Grace’등을 작곡한 존 뉴턴 등은 이런 사회적 변화의 한 예다. 그 결과 영국 정부는 노예선이 있는 곳마다 함대를 보내 이를 막았고 19세기 중반 이후 노예선과 해적선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과부를 산채로 화장하는 ‘사티’ 등 후진국의 악습을 사라지게 한 것도 영국의 공이다. 영국의 인도 지배가 한창이던 19세기 인도 전역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과부를 불에 태워 죽이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1813년에서 1825년 사이 벵갈 지역에서만 7,941명의 과부가 이렇게 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의 인도의 오랜 관행에 간섭한다는 것도 1857년 인도인들이 영국에 대해 무장 항쟁을 일으킨 원인의 하나였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영국이 식민지에 남긴 가장 큰 정치적 유산이다. 약탈과 착취를 근간으로 한 일본이나 스페인과는 달리 영국은 식민지 지배층을 영국에서 교육시킴으로써 장차 민주 정치를 할 수 있는 싹을 심어놨다. 한 때 식민지였던 인구 100만 이상 국가 가운데 현재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영국 식민지였다. 영국 식민지였던 53개 국 중 절반이 현재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 ‘가장 인구가 많은 민주주의 국가’로 불리는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현재 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을까.
영국이 쇠락한 지금 그 역할을 떠맡을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미국은 겉으로 보면 19세기 영국보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갖고 있다. 군사적으로 세계 주요 나라의 국방비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예산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첨단 장비 등 화력도 비교가 안 된다. 경제적으로도 최신 테크놀로지를 비롯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고 연예나 문화 등 ‘소프트 파워’에서도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과거 영국처럼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저자는 회의적이다. 우선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거쳐 탄생한 미국은 태생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 미국 역사를 관통하는 고립주의적 성향도 그래서라는 것이다.
최근 네오콘들 주도하에 이라크를 공격해 ‘중동 민주화’에 나선 것은 19세기 영국과 비슷한 면이 있으나 이것이 잘 풀리지 않자 전통적으로 제국주의에 반대해 온 좌파 진영은 물론 팻 뷰캐넌을 비롯한 우파 쪽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친일 진상규명 논란이 보여주듯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때 식민지였던 나라들에게는 특히 관심거리다. 한국에서는 친일을 둘러싼 목청만 높을 뿐 정작 일제가 한국에 대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제국주의의 공과 과를 다룬 퍼거슨의 책은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냉전 이후 미국의 역할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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