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독일에서 특이한 사전이 나온다고 한다. 여자들의 말의 뜻을 설명해주는 사전이다. 여성들이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뜻하는 바가 너무 틀려서 남녀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가 많이 생긴다는 것이 사전이 나오게된 배경이다.
똑같은 한국말로 말을 하는 데도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걸까”싶게 말이 안 통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말의 소리만 주고받을 뿐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언어의 기본적 기능은 전혀 작동이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어떻게 유독 이 사람들과 가깝게 된 걸까 생각을 해보면 결국 인연의 매개체는 말이다. 말이 통하면 가까운 사이가 되고, 안 통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며 무관한 사이로 굳어진다.
그런데 무관할 수 없는 관계에서 말이 안 통할 때 삶은 고달파진다. 가장 보편적인 케이스가 남녀관계 - 남편·애인의 무신경, 아내·애인의 원인 모를 토라짐으로 우리 내면의 기후가 잔뜩 흐린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화성과 금성만큼이나 서로 다른 언어 세계에 사는 남녀에게 이해의 다리를 놓아주려는 것이 이번에 나오는 사전의 취지로 보인다.
사전은 외식, 샤핑, 여행, 침실, 돈 등을 주제로 일상생활 중 많이 생기는 상황에 따라 여자들의 말의 의미를 설명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샤핑 중 여자가 남자에게 “이 구두 좀 봐줄래?”라고 말했다고 하자. 남자가 곧이곧대로 구두를 봐주며 ‘디자인이 좋다’거나 ‘색상이 튄다’거나 하며 코멘트만 늘어놓으면 그의 여자언어 이해 실력은 낙제점이다. 여자의 진짜 말뜻은 “이 구두 좀 사줄래?”라고 사전은 해석을 한다.
그런 상황이 독일에서만 일어날 리는 없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여성의 언어’ 사전을 화제로 삼았다. 여자친구에게 구두를 사주기로 했던 한 후배의 경험이다.
“여자친구가 구두를 집더니 ‘아, 이 구두는 너무 비싸지?’하더군요. 내 주머니 얇은 걸 배려해 주는구나 하고 고마워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여자의 말은 “이 구두가 정말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고, 그 말을 하면서 바란 것은 “비싸기는… 괜찮으니까 그걸로 사지”라는 반응이었다는 걸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고 했다. 몸살 난 아내의 심기를 읽지 못한 죄로 억울하게 구박을 당해야 했던 의사도 있다.
“아내가 몸살이 났다고 해서 타일레놀 두알 먹고 푹 자라고 했지요. 맞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아내가 잔뜩 토라져서 말도 안 하는 겁니다”
그 아내의 설명은 이렇다.
“몸살 나면 약 먹고 쉬어야 한다는 거 누가 몰라요? 사람이 아프다면 최소한 염려하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내가 받고 싶었던 것은 약 처방이 아니라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는 몰랐다.
주위를 보면 여자들은 참 서운한 게 많고, 남자들은 영문을 몰라 답답한 게 많다. 한 후배는 최근 한국에서 놀러온 조카에게 남편이 알아서 용돈을 챙겨 주지 않은 것이 영 야속했다. 섭섭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그 남편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공감할 말을 했다 - “왜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말하지 않은 건 모른다. 말 안한 건 기대하지 마라”
“이 구두를 갖고 싶다”“조카에게 용돈을 주라”… 분명하게 말하면 될 걸 여자들은 왜 말을 하지 않는 걸까.
‘착한 여자 신드롬’이 원인의 한 뿌리가 될 것 같다.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불구, 대부분의 여성들은 전통적 ‘착한 여자’의식구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여성스러움=착함’이라는 등식이 의식의 덫으로 작용해서 나를 내세우는데 소극적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당당히 요구하면 이기적이고 못된 여자로 낙인찍힐 것 같은 두려움이 무의식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여자들이 원하는 걸 말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말하지 않아도 남자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배려를 여자들은 사랑·애정의 증거로 여기는 데, 남자들은 ‘바쁘고 귀찮고 천성적으로 둔감해서’ 알아채지를 못한다. 여자의 침묵과 남자의 무신경 - 타협점이 필요하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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