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닥터 유의 소년시절, 서울 집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문중 학생들이 많았다. 의사였던 그의 아버님은 고명아들과 다른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매일 아침 한국일보 1면에 실린 시(詩)를 암송하는 자에게 만 용돈을 주셨다. 지금은 중년인 닥터 유가 입성이 반듯하면서도 해학적 감각이 풍부함은 그때 암송한 아침 시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신문이 수산시장의 펄떡거리는 생선들처럼 인간 본색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 매스컴이라면, 억센 1면 한 모퉁이에 실린 시 한 수는 새벽 호숫가의 파문처럼 청량함이었다.
나도 소년시절 암송까지는 못해도 시와 만남으로 상쾌한 하루를 시작했으며 하루의 희망이 배가되곤 했다. 요즈음은 그 임무를 고도원의 아침 편지가 대신하고 있지만 너무 쉽게 손에 쥐어주는 느낌이 들고 아무래도 깊은 사유에 바탕을 둔 시의 문학적 열정에는 못 미친다.
한국일보 아침 시는 기다림으로 점철되던 내 삶 안에 꿈을 심어준 장본 이다.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시간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짧고 함축된 신문의 아침 시는 그 후 내가 마음에 드는 시를 대할 때마다 가슴 쿵쿵거리게 하는 버릇에 길들여 주었다.
간절한 바램은 언제나 이루어지듯 미국에 와서도 한국일보를 만났다. 미국으로 입양 온 아기가 처음 보는 한국여인에게 와락 안기더라는 이야기처럼 반가운 해후였다. 다시 만난 한국일보는 타국생활의 등불이며 길잡이였다. 새벽 한시에 일 끝내고 다시 스토어에서 밤을 꼴딱 새우는 일을 할 때 가게 주인이 내게 준 선물도 한국일보였다. 글자 한자 빼지 않고 흩고 나면 창 밖 나뭇가지 사이로 또 하루 붉은 해가 솟았다.
그 신문이 모집한 1980년 인구조사 표어모집에 내가 당선되어 시상식에 간 날, 겁도 없이 글 쓰기로 약속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그 당시 한국일보는 LA에서 고속버스로 신문 뭉치가 오면 일주일에 두 번 이 지역 뉴스를 한 장씩 챙겨 각 가정으로 발송했다. 부정기적으로 글을 쓰다가 82년부터는 아예 고정란을 만들어 주어 나의 청장년은 신문과 함께 해왔다. 객원이라는 타이틀이지만 편집위원으로 10년이 되는 1990년에는 신산할 때 함께 해왔다며 강우정 사장은 기념패와 고급시계를 주었다. 년 말이면 신문사 주선으로 직원가족들과 함께 스키여행도 가고 설렁탕을 시켜 먹으며 신년 창간 특집을 만들고, 모두 퇴근한 밤에 혼자 남아 글을 쓰기도 했다.
83년에는 전직 기자출신 동포 한 분이 그동안 연재된 내 글을 묶어 책을 만들어 주었다.
20년 전 신문사 광고국장이 이민 올 때도 그 책을 읽고 왔다고 했는데 엊그제 우리성당 신부님도 신학생 때 본가 서재에서 그 책을 보았다고 하셨다. 그 후 책이 엮어질 때마다 신문사에서는 출판기념회를 열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송구스럽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인어른은 내게, 글을 쓰도록 이끌어 준 한무숙 선생과 글을 쓸 자리를 마련해준 강우정 사장을 항상 기억하라고 일러주셨다.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17년 간 이민 생활수기 심사를 맡아온 일이다. 그때마다 나는 심사하는 입장보다는 응모자들 모두의 독자가 되어 그들 삶의 편린들을 아름다운 영화 장면처럼 내 마음 안에 새겨두곤 했다.
인공위성으로 본지를 직송 받고 자체 윤전기로 신문을 찍는다. 우편으로 어느 날은 며칠이 걸려 배달되더니 이제 매일 아침 집으로 직접 배달되는 시대가 되었다. 원고지에서 팩스, 다시 이메일로 제작되는 과정을 나는 거북이처럼 따라왔다.
이민 백년사 출간 현대사 부분은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가 30년이 넘는 신문을 창고에 쌓아둔 덕을 톡톡히 보았다. 시간적으로나 전문 인력을 충분히 동원할 수 있었으면 귀한 자료를 전부 소화 할 수 있었으련만 그 점이 지금도 아쉽다.
아무튼 그동안 글 쓰기를 부업으로 살아왔다. 이제 내게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는지 몰라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글 쓰기를 본업으로 살고싶다.
세월이 맺어준 신문사 직원들과의 따듯한 인연, 신문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관계들을 생각하다보니 며칠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별리(別離)는 만남보다 귀할 때가 있으며 좋은 매듭도 풀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도 잃어서는 안 되는 신념은 삶에 의미를 주며, 일상의 기도는 믿음 안에 힘이 되며, 사랑은 우리들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라고 누군가 내게 준 말, 그리하여 내 생활의 지표로 삼고자 하는 이 말을, 그동안 글을 읽어 준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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