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정정당당해야 한다” 누군가 새삼 이런 주장을 한다면 아마 사람들로부터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주장하고 싶다. “누가 뭐래도 스포츠는 정정당당해야 한다.” 아무리 약은 세상이라지만 스포츠만이라도 ‘순수성’을 유지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이다. 그런 기대에서 보면 이번 아테네 올림픽의 체조 오심사건은 또 한번 사람들을 절망케 한다.
정밀하게 진행되는 국제경기에서 오심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이번에 문제된 양태영의 평행봉에 대한 심판들의 판정이 그들이 인정한 대로 ‘오심’이었다면 좋겠다. 정말 그렇다면 참담한 기분이 들 이유가 없다. 그냥 실수였다면 그 실수를 치료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넘기기에는 음습한 음모의 냄새를 외면하기 어렵다. 양태영의 스타트 점수를 매긴 심판 3명이 정확한 판단을 내렸을 때와 착오를 일으켰을 때 한결같이 의견일치를 보였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같은 연기를 두고 기술심 2명의 의견이 예선과 단체결승에서는 ‘밸리’로 내려졌고, 개인종합 결승에서는 ‘모리스’로 같았으며, 3차례 모두 주심이 이를 그대로 확정했다는 점. 그것을 상식적으로 납득하라는 것인가.
이번 판정의 주심은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또 기술심 중의 한 사람이 금메달을 가져간 미국 선수 폴 햄의 고향 오하이오주에서 수년간 살면서 코치생활을 했다고 한다. 국제체조연맹이 의외로 신속하게 ‘오심’을 인정하고 관련 심판들에 대해 징계조치를 내린 것도 왠지 찜찜하다. 그냥 이 정도 선에서 문제를 덮자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오심을 명백히 인정하고서도 금메달을 줄 수 없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한번 내린 판정은 바꿀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판정 번복에 따른 일시적인 권위실추를 면해 보려는 집착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해명해야 한다. 약물중독으로 밝혀져 판정을 번복하는 것과 오심으로 판정을 번복하는 것이 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선수가 잘못하면 판정 번복이고, 심판이 잘못한 것은 판정 번복이 안 된다? 그런 권위주의가 어디 있는가. 스포츠의 주역은 언제나 선수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스포츠의 주역은 무슨 협회니, 위원회니 하는 이름으로 스포츠를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선수들은 그들의 비즈니스와 명예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만약 양태영(한국)과 폴 햄(미국)의 입장이 반대라면 그들이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판정이 번복되고 금과 동의 위치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배영 200m 결승에서 판정 번복으로 미국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과, 승마 종합마술에서 역시 판정 번복을 통해 프랑스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더욱 속상한 것은 한국 선수단 임원들의 자세다.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지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 제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뒤늦게 야단인지. 대외적으로 왜 그렇게 저자세인지 되새겨 볼일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선수들뿐이다. 심판들이 잘못해서 금메달을 준 선수에게는 안 준만 못하게 만들었고, 금메달을 빼앗긴 선수에게는 평생 남을 상처를 주고 말았다.
나는 폴 햄이 차라리 금메달을 반납하기를 기대했다. 반납되는 금메달을 가져가는 선수가 한국선수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가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이 오심으로 얻어진 것이라면 그 금메달에 대한 집착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심이 분명하다면, 그래서 양태영의 기록이 나보다 높다면 금메달은 당연히 그의 것이다” 만약 폴 햄이 말이라도 이렇게 했다면, 그는 ‘오심으로 금메달을 딴 체조선수’를 넘어 삭막한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그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판정의 책임이 없고, 따라서 자신이 최고라는 점을 강조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체조선수 이상으로 클 수 있는 기회를 잃은 것은 분명하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지라도 잘못된 결과에 대해 정정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스포츠가 상업화 권력화 되었다 해도 ‘페어 플레이’ 정신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선수들보다도, 선수들 때문에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더 절실히 강조돼야 마땅하다. 4년 후에는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정정당당한 것이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올림픽을 기대한다.
안병선 샌프란시스코지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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