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렬(건축가)
출근길 언제나 지나가는 길가에 눈부신 햇살을 받고 무궁화가 가득히 피어 있다. 이맘 때 이 길을 지나노라면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무궁화는 나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잠시나마 조국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 꽃이라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친밀감이 들고 외로운 이민생활에 든든한 후원자를 만난 듯 출근길을 가볍게 해 준다. 미국에선 한국서처럼 그리 흔하게 볼 수는 없는 꽃이지만 이곳 뉴욕은 기후가 한국과 흡사해서 그런지 눈여겨 보면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꽃 무궁화! 한국 방방곡곡에 피어있는 무궁화! 그래서 무궁화 동산이라 불리우는 우리 조국! 어느 한 사람이 이 꽃을 나라꽃으로 삼자 하여 나라꽃이 된 게 아니라 온 백성이 한마음으로 사랑하는 꽃이어서 나라꽃이 되었다는 꽃, 무궁화는 곧 우리 겨레, 우리 민족 ‘전체의 얼’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 뭉쳐진 한 마음, 무궁화는 우리 겨레의 마음과 혼을 지니고 있는 꽃이다. 빼어나게 예쁘지도, 그렇다고 향기가 짙은 꽃도 아닌 무궁화, 그저 아름답고 은은한 향기를 지닌 소박하고 순결한 꽃, 무궁화는 보면 볼수록 친근감이 들고 사랑스런 꽃이다.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를 대표하는 것은 흰색 무궁화이다.
그러나 뉴욕에서는 흰색 무궁화는 그리 쉽게 볼 수가 없다. 보라색을 띤 붉은 무궁화가 대부분이다.흰색 무궁화는 백단심(白丹心)이라 하며 으뜸으로 친다. 그것은 무구청정을 의미하며 자주빛 꽃심은 우리 겨레의 심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희디 흰 바탕은 우리 민족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짙어지는 붉어짐은 한 가운데서 자주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우리 민족이 그리워하는 삶이라 한다.
한 송이씩 볼 때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떨어지는 하찮은 목숨을 가진 꽃이지만 새로 뒤달아 피고 이어지는 꽃이기에 나무 전체로 보면 조금도 줄지 않고 새로운 꽃이 가득히 피어있는 꽃나무, 이름대로 무궁화이다.
‘은근’과 ‘끈기’라는 우리 민족성을 이만큼 잘 나타내 주는 꽃이 또 어디 있을까. 모든 꽃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는 좋은 사월, 오월도 다 지나간 늦은 봄철부터 여름을 거쳐 시월을 지나 서릿발이 높아가는 가을에까지 피는 꽃, 무궁화는 가지를 꺾어 심으면 그대로 나서 핀다.
무궁화는 삼복 염천 폭염속에서 왕성하게 개화하여 다른 꽃들이 무더위에 맥을 못 출 때 더욱 꼿꼿하게 꽃을 피워낸다. 무궁화는 쓸쓸한 울타리 옆 거친 들판 외로운 길가에 아무데서나 핀다. 마치 어느 땅, 어느 나라에 떨어뜨려 놓아도 고난을 이겨내고 뿌리를 내리며 잘 적응해가는 우리 민족의 기질을 닮은 꽃, 우리 한인 이민의 삶의 정신은 이 무궁화 정신이 아
닐까.
사치스럽거나 가녀린 비단 천같이 보드랍고 매끈하지도, 요염하지도 않은 꽃, 무궁화는 풀먹여 빳빳한 의관을 입은 옛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꽃이다.그저 수수한 흰 무명천, 그 옥양목 천을 다듬이돌에 올려놓고 두들겨 반듯하게 하여 옷을 해입은 단정한 선비의 모습을 한 꽃, 무궁화는 검소하고 수수하지만 깨끗함을 느끼게 하는 꽃이다.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이겨나가며 올 곧게 살아가셨던 선조들의 모습을 닮은 꽃, 무궁화!
무궁화는 피고 집이 또한 다른 꽃들과 비교할 때 빼어나게 다른 깨끗함을 보인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대부분의 꽃들이 필 때는 화려하지만 질 때는 처량하고 추해지건만 무궁화만은 떨어질 때도 가지런히 오무라진 뒤에 꼭지가 빠지기에 지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구차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품위를 지켰던 선조들의 지조와 충절과 절개를 느끼게 하는 꽃, 무궁화!
무궁화는 요사함도, 오만함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포용과 넉넉한 마음의 군자다운 품성을 지닌 자상한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꽃, 보면 볼수록 품위와 무게를 느끼게 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 무궁화는 겉모습 보다 속 모습을 관찰하는 사색의 사람들에게는 볼수록 정이 가는 꽃이다.
외양만 추구하는 현대, 갈수록 나라와 백성들이 품격을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겨레의 꽃, 무궁화 속에 감춰진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재조명해 볼 때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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