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춘기(골동품 복원가)
‘속물’이라 했던가! 속물은 저질의 대명사와 같다. 속물은 종교에서 말하는 ‘세속’하고는 다르다. 세속은 공간개념인데 반하여 속물은 정신(인격)개념에 속한다. 그래서 속물 근성이라 한다.
속물 근성은 엉뚱하게, 그리고 분에 넘치게 잘나고 싶어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돋보이고 잘나고 싶어하는 속성은 출세지향주의 하고는 전혀 다르나 출세는 자기 개혁과 노력에서 얻어지는 인간 발전을 뜻하고 있으나 속물근성에서 싹트는 잘나고 싶은 충동질은 순전히 타의 시각과 청각을 의식한 말초신경의 만족에 두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본다. 결혼식장에 가면 신랑이 되고 싶고, 장례식에 가면 상주가 되고 싶고 현충일 국립묘지에 가면 송장이 되고 싶어하는 절실함이 바로 속물 근성의 면면이다.9.11테러 이후는 불가능했지만 15~16년 전, 나는 자유의 여신상 머리 꼭대기 전망대에까지 등반한 일이 있었다. 여신의 몸통 속으로 난 회전식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여기저기 낙
서가 있다.
날짜와 사람 이름들이다. 관리인이 지우고, 쓰고 지우고, 또 쓰고 그런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게 누더기가 된 여신의 몸통을 지나치면서 나는 어떤 기대감과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또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사다리를 기어 올라갔다.
드디어 나타났다. 무엇이! 한글 이름이! 가장 돋보이는 곳에, 가장 큰 글씨로 시야 가득히 들어온다. 글쎄가 역시로 속물들은 세계를 누비면서 속물 근성을 충족시키고 돌아갔다. 속물들의 가장 저질적인 속물 행동이 바로 자기 이름 새기고 돌아가는 행실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개인이 아닌 사회 차원의 속물 발상도 있었다. 70년대 한국의 문화유산을 시찰하기 위해서 유엔 유네스코 시찰단이 경주 불국사를 방문하였다. 시찰단의 한 사람이 불국사 기둥에 써있는 글씨를 열심히 필름에 담는다. “수상하면 다시 보자 방공방첩”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지역 고등학교 선생님이 하도 창피하고 당황한 나머지 기둥에 기어올라 방공 표어를 뜯어냈다.
이를 지켜본 유네스코 시찰단은 고적 사찰에 쓰여있는 귀중한 문화재를 저렇게 훼손하는 한국사람의 무지함에 놀랐을 것이요, 이를 지켜본 정보과
형사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을 반공법 위반으로 연행하는데 급급했다는 뒷소식이다.
시멘트 벼락을 맞고 있는 삼천리 금수강산! 자연은 한 번 훼손디면 다시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 금강산! 단연 한 반도가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명산이다. 그 명산이 속물 근성으로 멍이 들고 있다. 치마바위! 새색시 임산부가 득남 백일기도를 하기 위해 산에 오르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잠시 쉬어가려는 모양새의 치마바위! 임산부의 연한 속살이 가냘프게 비치는 그런 치마바위! 그 바위에 징과 망치롸 살아있는 인간의 이름을 새기고 돌아간 속물 근성!
이런 속물 행위가 조선 국가와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그 이름의 주인공이 ‘천출장군 김정일’이라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탑을 건립하는 것 좋다. 그것들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에 따라 민중의 손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이 그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태고로부터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그야말로 천출 치마바위’를 파서 인간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자연 앞에 인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다. ‘치마바위’는 영원하나 김정일은 순간이란 뜻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란 사실이 있다. ‘천출’이라는 뜻이다. 한국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천출’은 바로 천민(賤民) 출신으로 알고있지 하늘이 내린 천출(天出)로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봉건시대를 겪은 모든 민족국가의 공통된 역사의식이다.
‘천출(賤出)’ 바로 천민 출신 김정일이라 해서 무엇이 나쁜가. 천출(천민)은 ‘공산주의’의 기본 계급으로서 공산혁명의 주체이다. 천출(天出)을 주장하는 봉건시대의 왕조는 공산주의의 타도 1호이지 않는가!
목하 이북땅도 개방중에 있다. 머지않아 금강산에도 많은 외국 관광객이 찾아들 것이다. 그 때 ‘치마바위’에 새긴 ‘천출장군 김정일’을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세계 보편적 상식이란 시각에서 그것은 속물로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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