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8·15 광복절은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그 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나는 그 엄청난 민족적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어 영 체면이 서지를 않는다. 그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1945년 여름 서울에서 전문학교에 다니던 나는 방학을 맞아 청진의 집으로 내려갔다. 일본군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기차는 섰다 가다 하면서 22시간이나 걸려 겨우 고향역에 닿았다.
뛸 듯이 기뻐하며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몇 달만에 만난 딸에게 반가운 기색은 안 보이고 방공모(솜을 둔 어깨까지 내려오는 모자)와 철모, 그리고 구급약이 든 비상용 가방을 꺼내놓고 “경성이 더 안전할텐데…”라며 혼잣말을 하시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두워지니 공습경보가 울리고 라디오에서 “적의 B-29 00대가 청진을 향해 북진중이다-”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동생은 벌떡 일어서 방공모와 철모를 뒤집어쓰고 구급가방을 어깨에 매면서 달려나갔다.
나도 동생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뛰었다. 방공호에 앉아 먼 곳에서 쾅, 쾅 하는 폭격소리를 세면서 한숨도 못 자고 날이 밝았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밤이면 어김없이 B-29 기가 날아오는데 옷 입은 채로 방공호로 줄달음치고,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나오고, 또 다시 뛰어가고 나오는 일을 밤새 반복하다보니 낮에는 곯아 떨어져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악몽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달쯤 지났을까? 공습이 멈췄고 라디오에서 “적기가 히로시마에 신형폭탄을 투하, 인명피해가 났다”는 짤막한 보도가 나왔다. 그것이 일본 패망의 신호탄이었으나 우리는 알 턱이 없었다.
공습이 뜸해지자 어머니는 우리 자매의 혼수감을 분산시키자며 비단들을 꺼내어 짐을 꾸리셨다.
그 시대에 어디서 어떻게 구하셨는지 그 정성이 놀랍기는 했으나 어머니와 내가 그 땡볕에 손수레를 끌고 밀고 뛰었던 30리 길은 인생에 있어서 물질의 허무함을 깨닫게 해준 길이었으니 우리는 다시 그 비단들을 보지 못하였다.
터벅터벅 집에 돌아오니 혼자 집을 지키던 동생이 보이지 않고 언니가 남긴 쪽지가 있었다.
당시 동나남고등여학교 교사이며 기숙사 사감이던 언니는 급하게 갈겨쓴 쪽지에 “소련의 개입으로 피난명령이 내려 학생들을 모두 차에 태워보내고 와보니 동생 혼자 있어 마지막 남행열차에 동생만 데리고 떠납니다” 정말 바다쪽에서 함포사격이 시작되었고 소련 비행기가 떠다녔으며 라디오는 “피난을 떠나시오. 산쪽으로 가시오!”하고 여러번 반복하더니 뚜두뚝 하고 끊겼다. 내가 들은 마지막 일본방송이었다.
드디어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미수가루만 타먹으며 몇 일 밤낮 지하실에 박혀 있다가 결심했다.
“이렇게 앉아서 굶어 죽느니 가다가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나갑시다” 우리가 일대 결심을 하고 쌀, 김, 오징어 따위 먹거리를 조금씩 챙겨 지하실을 나선 것이 1945년 8월14일 아침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정든 나의 청진 집에 다시 가보지 못하였다.
수성천에 이르렀을 때 등골이 오싹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일본 군인들의 시체가 시커멓게 썩어 가는 모습으로 강둑을 끼고 죽 누워있는 것이었다.
대일본제국이 자랑하던 무적황군 명예의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라디오에서 들은 대로 밤이고 낮이고 산쪽을 향해 걸었다.
도중에 말을 타고 가는 후루가와 지사를 만났는데 평소에 하늘같이 높게만 보이던 도지사 각하가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게 친절히 “이 길을 따라 북으로 가서 연사역에서 기차를 타면 남쪽으로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알려주다니, 나는 너무 놀라워 믿을 수가 없었다.
발바닥이 부르터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어머니에게 매달리던 어느날 드디어 수만명이 들끓는 연사역에 도착했다.
그날이 8월18일이었고 우리는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내가 광복을 맞이한 순간은 언제쯤이었을까? 참숯 굽는 산판에서 흰 밥 얻어먹던 날이었을까, 철모가 너무 무거워 개울가에 내던지던 날이었을까?
“히로히토의 항복 소리를 라디오에서 듣고 거리로 달려나와 아무나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왠지 부끄럽고 약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순련<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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