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캘리포니아 8월, 나는 신호등에 멈추어 잠시 차창 밖 농익은 여름 숲을 바라보았다. 숲을 배경으로 요즈음 표현으로 말하면 몸짱 여인이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율동은 하계바다 파도처럼 출렁였다. 언덕을 내려오는 백미러로도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거울 속 내 눈을 무심코 보는 순간 부끄러운 짖을 하다 들킨 듯 쑥스러워 웃음이 났다.
그러나 만약 무인도에 미스 아메리카가 혼자 있다고 치자. 감탄하는 이가 없다면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몸매가 뛰어난 여인일수록 한순간 빛나고 스러지는 자기 미모를 틈만 나면 감추는 척 내보인다. 배꼽도 보여주고 치마길이도 무릎 위로 겁없이 올라간다. 그래서 꽃처럼 그녀들을 바라보자는 궁색한 변명이 뒤따르게 된다.
멋쟁이 G선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와 칠순이 지난 지금도 설계사 일을 한다. 그 분이 내 나이였을 때였다. 얼굴만 한국인인 아들과 드라이브하다가 앞을 보니 팔등신 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스치자 아쉽다는 듯 고개를 돌려 뒷모습을 보았다. 눈치챈 노총각 아들이 “대디 다시 볼까요?” 아버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차를 후진시켜 부자는 명화를 감상하듯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 우 정말 대단하죠?” 여인이 얼마나 섹시했는지는 몰라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던 G선생 부인이 더 멋져 보였다.
뭇 예술인들이 아름다움을 바라봄으로 작품 창작 내지는 승화시킴처럼, G선생도 남성의 감각으로만 보았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자신의 설계업무에 미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예술이나 영상에 관계없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 나치시대, 감금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유대인들이 쪼그리고 앉아 철조망 사이에 핀 들꽃을 바라보더라는 이야기는 차라리 하나의 슬픔이다. 그러나 절박한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모습 또한 얼마나 순수한 인간적 자태인가.
24년 전 K형은 5년 간 작은 가게를 하면서 어머니 회갑일 하루 문을 닫았다. 종업원도 없이 쉬지 않고 일을 하다가 그럴듯한 가게를 사고 은행에서 융자가 승인된 날, 암 통보를 받았다. 병원 창 밖 나무들의 싱싱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긴 세월 동안 뒤 마당에 나가본 건 두 번 밖에 기억이 않나. 그것도 한밤에 나가 별은 본 게 전부야.” 그 집 뒤 곁에는 사랑 받지 못한 여인들처럼 꽃들이 매년 쓸쓸히 피고 졌으리라.
그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답게 비즈니스 마인드가 비상했다. 그러나 이제 의사에게 “선생님 6개월 만 더 살게 해주세요. 아직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남겨질 가족과 세상 바라보는 행복을 놓쳐버림에 안타까워했다.
올 여름이 시작되는 날, 나는 거의 20년 만에 큰맘먹고 꽃들을 사다가 뒤 곁에 심었다. 밥풀처럼 작은 흰 꽃 무리 알리섬-뜰냉이, 형형색색의 패랭이꽃, 잎이 윤이 나고 흰색 빨강색 청순한 꽃잎의 빈카민, 노란 난쟁이-금송화, 보랏빛 로렐라이-블루 아이스. 이왕이면 봉숭아 채송화 할미꽃을 심고 싶었는데 어디서 파는지를 몰라 이름 아는 꽃으로는 코스모스뿐이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바람 따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면 강원도 가을 길목에 흐드러지게 핀, 군복무시절이 떠오른다. 하루 하루를 귀양살이처럼 지내던 시절, 그 고뇌와 짙은 고독이 지금은 그리움으로 다가서다니 참으로 인생이란 별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꽃을 심고 그 이름을 불러본 다음에야 김춘수의 시 <꽃>이 체험의 뒤끝처럼 가슴에 다가와 감동처럼 파문을 일으킨다. 태평양을 넘어 김춘수 시인이 위독하다는 소식이다. 그의 꽃빛깔과 향기가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한 노 시인이 혹여 숨을 멈춘다 해고 그의 시를 낭송하면 그는 기꺼이 다가와 당신 소원의 꽃을 피워주리라. 그래서 시는 시들지 않는 꽃이다. 지울 수 없는 꿈이다.
이재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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