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쯤 공유했음직한 의문과 좌절은 대충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통령은 박정희라는 사람이 전세 낸 자리인가”라는 물음이(자라면서 십수년간 본 대통령이 이 사람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것이고 매년 가을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될 때마다 남의 잔치 구경하듯 하면서 느껴야 했던 좌절 또한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갈피돼 있을 것이다.
또 4년마다 올림픽이 열렸을 때는 첫 금메달의 기대로 부푼 희망과 실망을 반복해야 했다. 해방 후 수차례 올림픽에 참가했음에도 68년 지용주가 복싱에서 딴 은메달이 최고의 성적이었으니 첫 금메달이 현실적인 기대로 쉽게 다가오지 못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76년 여름 어느 일요일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날아 든 양정모의 첫 금메달 소식에 모두는 환호하고 흥분했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으로 첫 금메달 후 다음 금메달이 나오기까지 8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기에 84년 LA 올림픽에서 금이 쏟아졌을 때 대한민국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모두가 하나가 된 듯 얼싸 안았다.
스포츠는 지난 100년 동안 끊임없는 자기 변화를 통해 쌍방향의 최고 문화 이벤트로 자리매김해 왔다. 스포츠의 주체와 객체는 다른 문화 이벤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스포츠의 영웅이 만들어지고 객체들은 이에 흥분한다. ‘우리 선수’ ‘우리 나라 팀’이라는 스포츠 주체들에 대해 같은 공간 속의 모든 이들이 열광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스포츠가 갖는 의미와 기능은 단순한 문화 이벤트나 유희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한국사회는 지난 수십년 동안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분열을 거듭해 왔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역적으로 대립돼 있고 계층간 단절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자기 입장과 주장만 생떼 쓰듯 고집하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당연한 것인 양 확산되고 있다. 얼마 전 LA에 왔던 추미애 전 의원은 “대한민국은 토론이 불가능한 나라”라는 한탄을 했는데 최근 몇몇 이슈를 놓고 싸우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그의 지적이 푸념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런 한국사회 속에서 스포츠의 사회 통합적인 기능은 더욱 두드러진다. 치고 받고 싸우던 한국사회가 하나 되는 경우는 국가적 위기 때나 국제적 스포츠 이벤트가 열릴 때이다. IMF 사태와 2년 전 월드컵의 광기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복싱의 황금기였던 70년대 미들급의 유제두가 일본의 와지마 고이치를 눕히고 세계 챔피언이 됐을 때 지역과 관계없이 온 국민이 열광했다. 역도 전병관이 금메달을 들어 올렸을 때도 그랬고 유도의 하형주가 금을 메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투표할 때는 후보 출신지 따져도 국가적 스포츠 이벤트에서는 그런 감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스포츠를 제외하고는 한국사회를 하나로 묶을 만한 기제가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시차 때문에 한국사람들을 2주 동안 뜬눈으로 지새우게 할 아테네 올림픽이 오늘 개막된다. 한 경제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팀의 올림픽 금메달 1개의 경제적 가치가 567억원에 달한다니 희소성이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해도 금메달에는 물리적 가치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메달 소식이 들려 오기 시작하면 우리 몸에는 엔돌핀이 돌 것이고 엔돌핀 분비는 수구, 진보 할 것 없이 모든 언론들이 동시에 쏟아낼 내셔널리즘적 제호들에 의해 더욱 촉진될 것이다. 그러면 언제 치고 받고 싸웠냐는 듯 온 국민이 하나된 듯한 모습도 잠시나마 연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됨에는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 마치 콧물이 흐를 때 감기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는 증세가 없어지겠지만 체질개선이 된 것은 아니 듯 말이다. 월드컵 때 너와 나가 없는 듯 모두가 광분했지만 과연 그 후에 사회적 통합이 더욱 견고해졌는지 의문이다.
이번에도 축제가 끝나면 모두는 이전에 걸쳤던 편견의 액세서리들을 다시 찾아 걸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스포츠보다 위대한 통합자는 불가능한 것인가. 관용과 토론의 문화는 정녕 남의 나라 이야기란 말인가. ‘올림픽 링거’를 꽂으면서 다시 한번 던지게 되는 답답한 질문이다.
조윤성<특집1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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