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아이구, 아야… 시어머님의 비명에 연경은 거실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그분은 무언가 날카로운 조각을 밟으셨는지 발을 움켜쥐고 거실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당신의 발을 찌른 게 손자가 가지고 놀던 레고 조각인 걸 깨닫는 순간 일그러진 어머니의 표정이 금새 박꽃처럼 환해지셨다.
우리 아이들 장난감이라도 저러셨을까? 그녀의 딸들은 걸핏하면 가시나들이 뒷손없다며 꾸지람을 하시는 할머니 때문에 어려서도 장난감 한 번 편하게 늘어놓지 못했다. 어쩌면 손자, 손녀 대접이 이다지도 다를까.
그나저나 이제 휴가도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휴가첫날 동부에서 시동생 식구들이 놀러오는 바람에 손님치레로 아까운 시간을 다 써버렸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손자에게 푹 빠져 부엌 한 번 들어오시지 않았다. 결국 연경은 자기식구 다섯과 시동생식구 셋, 총 8인분의 식사를 해대느라 발바닥이 다 화끈거렸다. 그들은 어제 오후에서야 제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잔뜩 상한 연경은 수혜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그러잖아도 장을 보러 나가던 참이었다며 점심이나 함께 하자고 했다. 새댁시절 직장동료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수혜가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꾸준히 우정을 이어갔다. 어쩌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서로의 비슷한 처지가 둘을 더 가깝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연경이 식당에 들어서니 미리 와있던 수혜가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수고 많았다. 휴가에 놀러가지도 못하고… 그나저나 이번에 너희 시어머니 엄청 좋으셨겠다, 그 귀한 손자 실컷 보셨으니.
실컷은 무슨 실컷, 손자가 눈에 밟힌다고 오늘 꼭두새벽부터 동부에 전화하시더라.
얘, 그래도 그 손자가 널 살려줬잖아. 시동생 장가들어 그 아들 날 때까지 네가 받은 스트레스를 한 번 생각해봐.
사실이 그랬다. 연경이 둘째로 딸을 낳자 아기를 보러 병원에 오신 시어머님은 당신 아들의 등짝을 두어 차례 세차게 때리셨다. 그러게 진작에 술, 담배끊으라니까… 그때 연경은 차라리 어머니가 옛날 무식한 노인들처럼 며느리한테 직접 욕을 하시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매는 남편이 맞았는데 등이 아프기는 그녀가 더 아팠다.
나, 사모님 직함 하나 더 달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는 연경의 질문에 수혜는 다소 엉뚱한 대답을 했다.
왜, 네 신랑 또 무슨 감투썼니? 이번엔 또 뭐냐?
이번엔 무슨 ‘효 장려회’ 회장님이란다. 솔직히 자기는 밤늦게 들어와 어머니 방문 빼끔 열고 인사나 하는 게 고작이면서... 그 사람은 자기가 없으면 이 지역 동포사회가 금방 망하는 줄 알잖아.
민석이 할머니 아들자랑이 또 늘어지셨겠네.
말도 마. 어머니 친구분들 사이에 민석아빠가 졸지에 천하의 효자아들로 둔갑했잖아. 정작 어머님을 모시는 건 난데.
사실 민석할머니에게 있어 아들은 거의 신앙이었다. 그분의 방에는 몇 해 전 아들이 무슨 단체장일 때 한국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창문처럼 크게 걸려있었다. 며느리인 수혜가 남편의 고질적인 공명심에 진절머리를 치는 반면 그녀의 시어머니는 아들의 탁월한 리더십을 사람들이 알아보고 자꾸만 일을 맡기는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있었다.
얘, 그나저나 장봐온 건 왜 식당까지 끌고 왔어? 날도 시원한데 차에 실어놓지.
응, 만두 하려고 간 소고기 좀 샀거든. 혹시 상할까봐. 우리 민석이가 만두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앉은자리에서 스무 개 정도는 뚝딱이야.
수혜는 학교 농구팀에서 활약하는 아들 때문에 늘 바빴다. 이번에 만두 파동이 나기 전부터도 그녀는 아들을 위해 언제나 자신이 직접 만두를 빚었다. 음식뿐 아니라 여기저기 게임을 쫓아다니느라 그녀는 운전도 적잖이 하는 편이다. 다행히 둘째인 딸아이는 엄마의 관심 밖에서도 혼자서 알아서 잘 크고 있다.
아들 너무 떠받들어 키우지마. 흉보면서 배운다고 너도 나중에 네 시어머니처럼 될까 무섭다, 얘.
걱정 마. 나 그렇게 안 미련해. 사실 내가 이렇게 안 하면 우리 민석이 반찬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 어제는 저녁상에 굴비를 구워 내놓았더니 어머님이 자꾸만 당신 아들 앞으로 밀어놓으시는 거야. 여름에 입맛 돋구는 데는 그만한 게 없다며. 운동하느라 땀 많이 흘리는 손자는 보이지도 않으시나 봐.
그때 수혜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무슨 일이야, 아들? 뭐라고? 캡틴이 됐다고?… 호호, 아임 프라우드 오브 유! 전화를 끊은 수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얘, 우리 민석이가 농구팀 캡틴이 됐단다. 걔가 원래 어려서부터 리더십이 있었잖아. 수혜는 리더십이란 단어에 잔뜩 힘을 주었다.
남편이 감투를 쓰면 공명심, 아들이 쓰면 리더십? 아들의 전화를 받은 뒤로는 수혜는 통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연경은 슬슬 수혜를 만난 걸 후회했다. 오나가나 아들만세, 만만세!
연경이 풀죽어 돌아오는 길목, 중학생쯤 되었을 계집아이 서넛이 길을 건넌다. 열린 차창 안으로 까르르 그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참, 내게도 저런 귀한 보물이 있지. 아들보다 열 배, 백 배나 소중한. 그래 오늘 그 딸들을 위해 만두를 빚자. 굴비도 구워야지. 연경은 마켓 쪽으로 힘차게 핸들을 돌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