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학 동창이 “정말 덥죠?”라는 제목으로 이 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은 요즘 숨이 막힐 듯 무더위가 심하다고 한다. 찜통 같은 더위를 뚫고 한줄기 산들바람을 보내듯 그는 샹송을 담아 동기 동창들에게 보냈다. 우리는 불어 전공이었다.
날씨만큼이나 ‘찜통’인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뉴스 속에서 며칠 전 한줄기 바람 같은 청량한 뉴스가 있었다. 초등학생이 지리산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2박3일을 혼자 견딘 후 무사히 구조된 소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정희재 라는 소년은 지난 1일 아버지 등 가족 친지들과 등반을 하던 중 저녁 7시께 해발 1,600m 지점에서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었다. 잠깐 헤매다 보니 날은 저물고 아이는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버려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 주는 공포, 그리고 계곡 물로밖에는 달랠 길이 없는 극심한 배고픔을 견디며 아이는 등산객에게 발견되기까지 40시간을 홀로 버텼다.
아이들이 너무 유약해서 걱정인 시대, 어른들도 툭하면 자살하는 시대에 소년이 보여준 꿋꿋한 정신력과 생명력은 무더위 속 바람줄기처럼 반갑다. 그런데 아이가 그만큼 버틸 힘과 지혜를 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말이었다.
첫날 밤 어둠 속에서 겁에 질렸을 때 아이는 “우리나라 산에는 사나운 짐승이 살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다고 했다. 둘째 날 비가 내리자 “산에서 비를 맞고 잠이 들면 죽을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위급한 사태를 예상하며 그런 말들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평소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무심코 했을 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위력을 발휘했다. 말 덕분에 아이는 생명을 건졌고, 아버지는 아들을 되찾 았다.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들이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말의 힘이다. 특히 자녀가 사춘기가 되어 말끝마다 벅벅 대들고, 말대꾸를 하고,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행동이 바뀌지를 않는 사태가 계속되면 아예 말하기를 포기하는 부모들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할 말을 하라는 것이 아동심리 전문가들의 충고이다.
이유는 첫째, 말로 표현하지 않고는 의사 전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 부부, 애인 등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오해는 종종 “말을 하지 않아도 알려니-” 하는 비현실적 기대에서 비롯된다.
취재를 통해 만난 후 6~7년째 안부를 주고받는 분이 있다. 아버지와 자녀를 함께 만나는 취재였는데 그 인터뷰 과정에서 딸과의 사이에 있었던 오해가 풀렸다며 그분은 늘 내게 고마워한다. 당시 그분은 ‘사랑한다’는 말이나 칭찬보다는 명령하고 야단치는 게 전부인 전형적 이민 1세의 아버지였고, 사춘기의 딸은 폭군 같은 아버지에 대해 거칠게 반항했다. 딸은 항상 야단만치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몰랐다고 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알았지요. 딸아이는 내가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둘째, 부모가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녀들이 겉으로는 안 듣는 것 같아도 사실은 듣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흡연, 음주, 마약 문제 전문가들이 안타까워하는 사실이 있다. 자녀들의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인데도 부모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마음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인지도 모르겠다. 자녀가 유년기일 때 농부는 참 행복하다. 그 마음 밭이 기름진 옥토여서 씨를 뿌렸다하면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는다. 자녀가 10대로 들어서면 토양이 바뀐다. 돌밭이거나 가시덤불 숲이다. 씨를 뿌려도 감감 무소식일 때가 많다. 하지만 겉으로 흔적이 없다해도 부모가 뿌린 말의 씨는 자녀의 마음 밭 어딘 가에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낸다.
인생의 여정에서도 지리산 깊은 산 속에서처럼 길을 잃는 일들이 닥치곤 한다. 그때 우리 자녀는 내가 해준 어떤 말로 힘을 얻을까. 그들이 인생의 구비 구비에서 바른 선택을 하도록 지혜와 의지가 담긴 말의 씨앗들을 좀 풍성히 뿌려놓아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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