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해보니 책상 위에 장미 한송이가 놓여 있었다. “장미라… 누가 갖다 놓았을까”- 짚이는 사람이 없으니 가슴이 설렐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익명으로 놓인 장미는 판으로 찍어낸 듯 똑같은 내 아침의 일상을 흔들며 마음속에 기분 좋은 파장을 일으켰다. 컴퓨터를 켜고, 이 메일을 체크하고, 신문을 읽는 대신 장미의 주인공을 수소문하는 일로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변화는 즐거웠다. ‘범인’은 한 어린 후배였다.
만약 책상 위에 놓인 것이 장미가 아니라 연애 편지였다면 어떠했을까. 말없는 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말들로 가득 찬 편지였다면 - 그래도 짚이는 사람이 없다고 무 덤덤할 수 있었을까.
누군지 모를 사람이 보낸 연애편지로 인해 중년 여성의 나른했던 삶이 갑자기 생기를 찾는 과정을 그린 멜로 드라마가 있었다. 1999년 드림웍스가 제작한 ‘러브레터’라는 영화였다.
주인공은 이혼한 후 딸 하나를 데리고 서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 여성.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던 그가 어느 날 소파 사이에서 한 통의 연애편지를 발견한다. 구구절절 애절한 사랑의 밀어들은 그의 가슴에서 죽은 듯 오래 잠들어 있던 감성을 흔들어 깨운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주변의 모든 남성들을 새로운 눈으로 탐색하면서 중성처럼 무신경하던 중년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긴장감을 되찾는다. 다시 가슴이 설레고, 두근두근 거리고 … 사랑이라는 바이러스로 삶이 활력을 되찾는다.
나이 들면서 슬픈 것은 사랑으로 가슴 뛸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설렘, 그리움, 애절함, 아련함, 애틋함, 달콤함, 혹은 가슴 싸-한 슬픔 같은 순수한 감정들은 생활의 고단함에 밀려서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을까”싶게 아련히 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달콤한 사랑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이 여성의 또 다른 현실이다.
한국 연속극이 인기인 것은 여성들의 이런 심리와 상관이 있다고 본다. 비슷비슷한 줄거리의 멜로 드라마들이 수도 없이 반복되어도 그때마다 화제가 되는 것은 감성이 들어설 틈 없는 각박한 현실과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마음 사이의 갭 때문일 것이다.
불과 얼마 전 ‘발리에서 생긴 일’‘불새’가 인기를 끌더니 요즘은 ‘파리의 연인’이 한국에서 시청률 50%를 넘나드는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겨울 연가’가 폭발적 인기를 끌어서 주인공 배용준이 최고의 개런티를 받고 CF모델 계약을 맺었는가 하면 ‘겨울 연가로 배우는 한국어 교본’이 10만부나 팔렸다. 여주인공 최지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관저를 방문해 환대를 받기도 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방금 제주도에서 돌아왔는데 제주도와 최지우는 발음이 비슷하군요”라고 잔뜩 친근감을 표시하며 최지우를 맞았다. 정치인인 고이즈미 총리가 ‘겨울연가’ 팬임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지지층인 30-60대 여성들의 마음이 야당 쪽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붙잡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중년 여성들이 멜로 드라마의 약한 것을 그가 파악한 것이다.
똑같은 3각·4각 관계, 재벌 아들과 가난한 여주인공, 그들 사이를 훼방놓는 제3의 여성 … 붕어빵 찍어내듯 비슷한 이야기라서 식상할 만 한데도 새 드라마가 나오면 언제 그런 이야기가 있었느냐는 듯이 시청자들은 또 다시 심취한다.
신세대 극작가들이 맛깔스럽게 대사를 쓰고 감칠 맛있게 전개를 시키는 덕분이기는 하다. 젊은 여성 극작가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남성작가들은 흉내낼 수 없는 섬세함으로 여성 심리를 묘사, 여성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여가활동이 한국 비디오 시청으로 제한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가슴 설렐 일없는 중년 여성의 삶에서 비디오를 통한 대리만족, 혹은 카타르시스가 꼭 나쁠 것만은 없다고 본다.
TV 보는 동안만은 내가 여주인공이 되어보는 정서적 리얼리즘의 효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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